좋아하지 않.. 좋아합니다.
여름방학의 끝을 앞두고 포틀랜드 여행을 다녀왔다.
(방학 징글징글하게 길었다 정말! 두 달 반 동안 수고했다, 애미야)
LA에 비해 선선한 날씨도, 맛있는 맥주와 커피도, 아이들 손을 잡고 골목골목 누비는 도시의 풍경도, 콜럼비아 강을 끼고 달리는 84번 도로와 휴대폰이 안 터지는 숲으로 둘러싸인 6번 도로도 다 좋았다.
여행을 좋아하냐고?
여행하는 내내 연신 “참 좋다”고 말하고, 돌아오기가 무섭게 9월 뉴욕여행 계획을 짜고 있는 주제에 우습지만, 잘 모르겠다. ‘여행을 좋아하냐’는 질문은 늘 그랬다. 나는 분명 전 세계 방방곡곡을 다 가보고 싶다거나 여행을 위해 일상을 버티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다. 아늑한 집에서 조용하게 보내는 일상을 사랑하는 내향형 인간이다. 하지만 딱 부러지게 ‘아니, 난 여행 안 좋아해’라고 말하기엔 꽤 많은 곳을 가보기도 했고 (길고 짧고 가깝고 멀고를 떠나) 여행을 자주 다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왜 계속 여행을 할까?
답을 찾기 위해 기억력이 안 좋은 내 기억에 남아있는 몇몇 여행의 단편을 떠올려 본다.
동생과 둘이 한 멕시코 시티 여행
대학생인 나와 고등학생인 동생이 둘 다 소심하고 겁도 많은 주제에 어찌 엄두를 냈는지 지금 돌이켜봐도 놀라운 여행지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여행책자를 보면서 부지런히 다녔지만, 알록달록 예쁜 색깔의 건물들 덕분에 사진이 잘 나왔던 기억, 대중교통을 타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던 휘파람 소리, 신데렐라처럼 6시도 되기 전에 호텔에 들어와 엎드려서 열심히 끄적였던 여행 기록(이 노트 어디 갔나?) 정도가 떠오른다.
엄마아빠와 함께 한 북유럽 패키지여행
짧은 일정 내에 북유럽 4개국을 도는 빠듯한 일정의 패키지를 선택한 건 다시 생각해도 큰 패착이었다. 덕분에 일정의 대부분을 버스에서 보내야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가이드는 재미도 없고 말만 많은 아저씨였다. 우리 가족이 버스 맨 뒷좌석을 차지하고 앉아 가이드의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와중에 아빠가 난데없이 큰 방귀를 뀌었던 일이 북유럽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아니었을까. 그날 우리는 누가 들었을까 노심초사하면서 배꼽이 빠지도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 친구들과의 싱가포르 여행
3박 4일인지, 4박 5일의 일정 가운데 스냅샷처럼 남아있는 장면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호텔의 루프탑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칵테일을 마셨던 어느 밤이다(서울에서 수도 없이 함께 했던 행위라는 점). 그리고 세명 중 한 친구가 보내서는 안 되는 문자를 보내는 바람에 이 사고를 어떻게 수습할지 밤새 토론을 했었는데 지나고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해프닝이지만 이 역시 또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아이들과 하는 여행의 매 순간이 즐겁기만 할 수는 없다. 공항에서 대기할 때부터 비행하는 시간 내내 지루하다 보채는 아이를 영상 없이 어르고 달래다 보면 제대로 된 일정을 시작하기 전부터 지친다.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덥다고 아이는 투덜거린다. 아침 식사를 건너뛸 수도 없고, 점심을 많이 먹어 배가 부르니 저녁은 가볍게 먹자는 식의 유두리를 발휘하기가 어려워진다, 아이와 함께라면.
그래도 나의 지난 여행이 말해주듯, 여행의 기억은 때로는 좋고 나쁜 걸 떠나 임팩트 있는 사건(ex. 방귀, 문자)이 되기도 하고, 시각(ex. 건물의 색깔)이나 청각(ex. 휘파람) 같은 오감으로 받아들인 느낌일 때도 있으며, 특별한 것 없는 일(ex. 루프탑 칵테일)이 스냅샷처럼 남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이렇게 다양한 감각의 기억, 아름다운 추억,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한데 엉켜 저 깊숙한 장기기억 저장공간에 남는 것이다.
이에 더해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하다 보면, 늘 보던 아이들인데도 새삼 ‘많이 컸구나’하며 성장을 실감하기도 한다. 이번에도 유모차 없이 아이들 손을 잡고 도시 골목골목을 걷다 보니 문득 ‘언제 이렇게 커서 하루 만보씩 씩씩하게 잘 걷는 어린이가 되었지’ 감개무량한 기분이었다.
그렇다. 여행을 다녀오면 서둘러 나가느라 엉망인 집안 꼴과 한 보따리의 빨랫감을 보며 한숨이 나오지만, 그래서 나는 그래도 나는 또 다음 여행을 계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