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분하고 억울하게 만드는 것들
“남자 치고 나 정도면 잘하는 거지!”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을 텐데 남편은 출근 전 뱉은 저 한 마디 덕분에 오늘도 아침부터 나한테 들들 볶였다. 내가 생각해도 말은 더럽게 잘하고 세상 제일 논리적, 분석적인 와이프를 만나 무지 피곤할 것 같은데(남편에게도 종종 말하지만, 내가 남자라면 절대 나 같은 여자와 결혼하지 않을 거다) 사주 때문인지,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려 들어서인지, 남편은 대체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곤 한다.
*결혼 후 우연히 가볍게 본 사주상에서도 남편은 나의 불같은(?) 성격을 잘 받아주는데 그게 본인한테는 전혀 아무렇지 않다고 하더라. 모두에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 아니한가?!
나는 기본적으로 남편이 참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라고 생각한다. 가족들이나 주변 친구들에게도 늘 그렇게 이야기하는 편이다. 결혼을 한 이상, 미우나 고우나 ‘나의’ 남편이기 때문에 그가 착하고 나와 아이에게 잘한다고 얘기하는 건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그가 잘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싸우지 않기 위해, 내 마음의 평화와 가정의 화목을 위해 남편이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다고 믿는 것과는 별개로 남들이(가령 우리 아빠라든지) 지나치게 그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편이자 아빠로 추켜 세운다든지, 주변 형들이 ‘요즘 ㅇㅇ이같이 집에 잘하는 애가 없다’고 했다는 말을 본인 입으로 전한다든지, 혹은 오늘 아침처럼 난데없는 자화자찬을 시전 하면 갑자기 내면의 분노 게이지가 상승하는 걸 느낀다.
내가 남편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건,
강한 멘탈 덕분에 공부와 육아와 (미천하지만) 살림을 병행하다가 문득 폭발하는 나를 잘 감당하고, 주중에는 하루 한 시간 남짓에 불과하나 아기와 즐겁게 놀아주면서 함께 하는 시간이 짧음을 아쉬워하고, 주말에는 주중에 부족했던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먹이고 재우는 일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실제로 엄청나게 많은 양의 노동의 성격으로서의 육아를 한다기보다는 아기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열심히 즐겁게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과 태도에 대한 인정인 것이다.
그렇지만 아기 한 명을 키우기 위해 과일과 채소, 고기, 우유와 간식 등의 각종 먹을거리와 기저귀, 샴푸와 로션, 치약과 칫솔 등을 떨어지지 않게 채워 넣고, 계절마다 필요한 옷과 내의를 구비하고, 월령에 맞는 그림책을 알아보고 주문하고 커가면서 심심하진 않을까 걱정하며 방문수업을 찾아보고, 6개월마다 영유아 검진을 위한 문진표를 작성해서 병원에 데려가 버둥대며 우는 아이를 붙잡고 진찰받는 일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버거울 만큼 많은 노동이 따른다. 그리고 위의 항목 중에서 아이가 20개월이 되도록 남편이 해본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본인이 밖에 나가서 ‘늘 회사 집만 오가는 가정적인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니 형들은 ‘가정적인 남편’이라 했다지만, 지난 20개월간 이모님이 퇴근하시는 여섯 시 이후 나의 외출 횟수는? 내가 아이를 위해 하는 수많은 일들을 감당하면서 공부와 운동 같은 자기 관리까지 잘한다고 누군가에게 ‘좋은 아내’ ‘좋은 엄마’라는 칭찬을 받은 적이 있던가?
한편으로 오늘 아침 있었던 일은, 내가 그동안 남편이 잘한다고 생각하는 만큼 말로 표현해주지 못해 칭찬이 고팠던 남편의 궁색한 자기 위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미안하다, 남편. 앞으로는 당신을 덩실덩실 춤추게 하는 칭찬을 부족함 없이 해주려고 노력할게!
그러니 ‘우리’ 아들 키우는데 참여하고 있다는 유세는 넣어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