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고민의 마무리
개인적으로 '첫째를 위해 둘째를 낳는다'는 좋은 의사결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선, (대부분의 경우) 어린아이는 형제자매가 뭔지 알지도 못하고 동생을 낳아 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다. 그리고 부모의 애정과 관심, 시간과 비용 투자의 집중 측면에서 외동의 이점도 상당히 많다. (실제로 이러한 이유로 하나만 낳기로 결정하는 커플들도 많은 걸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형제자매가 있다는 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여동생을 가진 언니라서, 자매라서 더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형제나 남매보다는 좋은 자매 관계가 더 많으니까) 나에게 두 살 어린 여동생은, 어릴 땐 나만 졸졸 따라다녀 귀찮으면서도 대장질이 재미있었고, 인형만 있으면 얼마든지 역할놀이를 할 수 있어서 좋았고, 학교놀이를 한답시고 배운 걸 가르치다 보면 내가 세상 제일 똑똑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크면서 가끔 싸우기도 하고 나와 다른 점들이 이해 안 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부끄러울 만큼 옹졸한 마음, 가끔은 속물 같은 내 모습까지도 터놓을 수 있는 좋은 친구다. 그리고 부모님 연세가 더 들면서 자식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기에는 지금보다 더욱 의지되는 존재일 거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꼭 첫째를 위해서(이게 제1의 우선순위는 아니지만), 나와 남편을 위한 마음에 더해 첫째에게도 형제자매를 선물해 주고 싶다. 그러니까 이건 첫째뿐 아니라, 둘째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아기를 낳을 때도 '내가 과연 아이를 낳아 잘 키울 수 있는 사람인가?' '나의 역량과 조건은 충분한가?' 등을 고려해야 한다.
사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부모에게 필요한 역량과 조건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그리고 설사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고 해도 현실은 상상과 다를 수 있다. 한 명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과 둘이 되고 셋이 되는 것 역시 다를 것이고, 그래서 지금 내가 짐작하는 것도 불완전하기 짝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한 명이나마 아이를 키워 본 경험을 바탕으로 임신과 출산, 육아에 필요한 역량과 조건을 살펴보자면,
1) 경제력
'다산은 부의 상징'이라고 이야기하는 시대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3~4억이 든다고 한다. 경악스러운 액수이고, 집집마다 차이가 날 수는 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아이에게는 쏠쏠하게 돈이 들어간다. 각종 기형아 검사와 초음파 검사 비용, 수백만 원에 달하는 조리원 비용부터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려운 살림살이까지... (ex. 젖병, 젖병소독기, 분유 포트, 유모차, 카시트, 범퍼침대, 이유식 조리도구, 모빌, 바운서 등등)
사실, 이것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앞으로 발생할) 교육비일 것이다.
내 아이와 비슷한 월령의 아이들 중에도 이미 사교육계에 입문한 아이들이 꽤 많다. 그래 봐야 방문교사가 책을 읽어주거나 촉감놀이를 해주는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조금 더 크면 영어 노출을 고민할 시기가 올 것이다. 그 이후엔 영어 유치원을 보낼지, 사립 초등학교를 보낼지, 대치동으로 이사를 갈지... 나는 아이의 교육을 놓고 끊임없이 고민할 것이고, 고민 끝에 어떤 결정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건 모든 결정은 돈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결정을 하든 나는 돈을 쓰게 될 것이다)
돈만이 의사결정의 기준은 아니고, 돈이 있다고 해서 결정을 내리는 게 쉬워지는 건 아니지만, 아이를 키우는 데는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게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돈이 없으면 그 자체로 좌절감이 들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들어가는 돈에 부담을 느끼고, 다른 부모에 비해 많이 못 해주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결과적으로 모두가 불안하고 피폐하고 불행해질 수 있기 때문에 경제력은 생각보다 중요하며,
다행히, 우리의 경제력은 괜찮은 편이다.
2) 체력
아기를 낳은 엄마들끼리 종종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낳았어야 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는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몸속에서 강낭콩 만한 태아를 3~4kg에 달하는 완전한 사람으로 키워서 낳고, 그 아이를 밤낮없이 먹이고 입히고 재우면서 엄마의 몸은 너덜너덜해진다. 외적인 변화(탄력 없는 뱃살, 탈모, 건조한 피부 등)는 말할 것도 없고, 발목과 무릎이 시리고 손목이 저리고 굽은 등과 어깨는 쑤신다.
엄마보다는 훨씬 덜하겠지만 아빠라고 무사할까? 신생아 때는 몸조리가 덜 된 상태에서 잠 못 자고 아이를 돌보는 엄마를 대신해 종종 이유 없이 목 놓아 우는 아이를 안아 달래고, 조금 더 큰 아이,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사방팔방 뛰어다니면서 소파와 침대를 오르내리는 아이와 몸으로 놀아주는 건 온전히 아빠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비교적 젊은 (생물학적으로 꼭 젊은 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꾸준한 운동으로 또래 대비 건강한 몸을 가진) 엄마 아빠라고 생각한다.
3) 주변 환경(도움)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외국 격언을 들은 적이 있다. 소감은? 격.공.
물론 아이에 대한 main 책임은 부모에게 있고, 부모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지만,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있는지 여부는 무시할 수 없는 문제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 산후 우울증은 남의 얘기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우울한 기질이 있던 사람이나 멘탈이 다소 약한 사람이나 겪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출산을 하고 나서야 왜 엄마들에게 산후 우울증이 찾아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육아는 생각보다 끊임없는 노동을 요하고, 그러한 노동을 감당하기에 출산을 한 엄마의 몸과 마음 상태는 생각보다 너덜너덜하다. 그리고 아이의 웃음, 옹알이 등은 달콤하지만 단기적이고 미미한 보상일 뿐이며, 성인과의 한 마디 대화 없는 하루는 생각보다 아주 길고 많이 외롭다.
양가 중 어느 쪽이든 근처에 살면서 이런 엄마에게 가끔이나마 숨 쉴 구멍을 만들어 줄 수 있다면, 모두에게 다행이고 축복이고 감사한 일이다. 아이가 아프거나 엄마 본인이 아픈 비상시국에는 이루 말할 필요도 없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길 건너 사는 나의 부모님은 아이를 낳은 후에도 여전히 (이전보다 더욱 열심히) 나를 돌봐주고 계시며, 우리가 계획 중인 둘째가 태어날 즈음엔 남편이 가정에 아주 많은 시간을 할애할 예정이다.
4) 정신력 (혹은 성향)
정신력이라는 표현이 적합한 지 모르겠지만,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데에는, 그리고 첫째에 이어 둘째를 낳을 것인지 결정하는 데에는 육아에 필요한 정신력과 육아에 알맞은 성향을 따져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육아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스트레스(육아 자체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보상 없는 노동들, 이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피로감, 육아에 치이면서 흔들리는 엄마의 정체성 등)를 감당할 수 있는 멘탈과 엄마(와 아빠가) 육아라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지 성향을 고려했을 때,
우리는(특히 남편은) 상당히 강한 멘탈을 가졌으며, 육아를 꽤 즐기고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느낀다.
이렇게 '왜 둘째를 낳고 싶은지, 어떤 고민을 거쳐 이런 결정을 한 건지' 구구절절 장문의 글을 적으면서도 마음속 한편에는 걱정과 의심,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나 역시 이렇게 적어봄으로써 내 결정을 다시 한번 합리화하고 이왕 결정했으니 기쁜 마음으로 해보자며 나 자신을 추스르는 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