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를 낳기로 결심했다
이야기가 다소 샛길로 빠져서 육아의 고충을 토로하는 장이 되어 버렸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둘째를 낳기로 결심한 이유를 살펴보자.
사실 예쁘다는 이유는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다. 또 아이는 인형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할 수는 없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에는 엄청난 시간과 돈과 노력이 들어갈뿐더러, 열심히 한다고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데에 따르는 부담감 역시 굉장하다.
그렇지만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예쁘고, (적어도 나에게는) 이것이 무엇보다 큰 이유가 된다. 아이를 낳은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합리화할 수 있는 이유, 주변의 지인들에게 아이 낳는 것을 추천하는 이유, 그리고 내가 둘째를 낳기로 결심한 이유.
아이를 통해 살면서 지금껏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들을 느낀다. 임신 중 뱃속에서 꼬물거리는 태동을 느꼈을 때 그 경이로움, 우렁찬 울음소리를 터뜨리며 세상에 나온 아기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 느낀 감격스러움, 본능적으로 힘차게 젖을 빨아대던 그 작은 입을 보며 느낀 신비로움, 눈을 뜨고 난 후 모유수유를 하는 매 순간 우리 사이에 오고 간 교감과 세상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주는 아이 덕분에 느낀 황홀감 등.
좋은 감정만 있었냐 하면 물론 그렇지는 않다. 출산 전에는 느껴보기 힘들었던 엄청난 수준의 피로감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것이 육아인지라, 언제까지 이 피로감을 안고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더 무서운 피로감)과 더 이상 가벼운 혼자 몸이 아니라는 데서 오는 삶의 무게감 같은 반대급부도 따른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이 이렇게나 예쁘고 사랑스럽고 애틋할 수 있다니 놀랍고도 놀랍고도 놀랍다.
"육아가 이렇게까지 힘들 줄 알았니?"라는 아빠의 질문에 내가 했던 말이 있다.
"아니, 아빠. 전혀 몰랐어. 그렇지만 이렇게나 말도 안 되게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모름지기 사람이 태어났으면 아이도 낳아보고 키워보고 해야 진짜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사람은 왜, 무엇을 위해 태어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차피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인데 굳이 괴롭고 어려운 선택을 할 필요 있나? 최대한 즐기고 행복하게 살다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인간이라면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지적으로 성장하는 것만큼이나 정신적, 영적으로도 성숙하고 충만하기를 갈망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얻은 것들, 그리고 성장한 부분들을 꼽아 보자면,
- 인간, 나아가 인류에 대한 사랑이 커지고 포용력이 생겼다.
원래도 아이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제는 정말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아이들이 더 예쁘고 사랑스럽다. 예전에는 깜찍한 외모나 귀여운 옷차림이 눈길을 끌었다면, 이제는 존재 자체에서 사랑스러운 생명력을 느낀달까. 아이들 뿐 아니라 성인들을 대할 때는 이전과는 다른 마음을 갖게 된다. 지금 찌푸린 표정으로 험한 말을 하고 있는 저 사람도 엄마에게는 숨소리마저 사랑스러운 소중하고 귀한 자식이겠지, 생각하면 다시 한번 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게 된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서로를 이런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범죄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텐데...
-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겸손과 겸허를 배웠다.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살면서 대부분의 영역은 나 자신에 의해 컨트롤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아니, 가능했다. '하면 된다' '꿈은 이루어진다'를 부르짖는 남편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노력하면 대체로 이뤄지는 세상을 살아왔다. 아이는 달랐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아이는 불완전하고 당분간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작고 연약한 존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출산과정부터 아이는 out of control이었다. 임신기간 내내 아기가 평균보다 크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자연분만을 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로 열심히 노력했다. 임신 전부터 하던 필라테스가 골반의 유연성을 높여 자연분만을 수월하게 한다고 해서 안정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출산 전 주까지 주 2회 꾸준히 레슨을 받았고, 너무 크면 자연분만이 어렵다길래 이 악물고 아침저녁으로 운동장을 돌았다. 그렇지만 결과는? 유도분만 실패 후 제왕절개. 10개월 간 공들인 나의 탑은, 하루 꼬박 진통하는 동안 아기가 하늘을 보게 되면서 와르르 무너졌다.
육아는 더욱더 내 맘 같지 않다. 조리원을 나온 순간부터 아이가 만 15개월이 넘은 지금까지 늘 그렇다. 그리고 단언컨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너무 예쁜 아이로 인해 감정적으로도 풍요로워지지만 (1. 자식은 너무 예쁘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 우리 모두의 삶이, 우리 가정이 풍요로워졌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결혼 전 나는 남편과 영화, 뮤지컬, 미술관, 책과 음악 등 다양한 문화생활과 신앙, 봉사와 기부를 통해 삶을 풍요롭게 하자고 이야기했다. 자녀 계획은 처음부터 있었지만, 풍요로운 생활과 아이를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우리의 문화생활과 신앙생활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삶은 각자의 일과 육아에 매몰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상상 이상으로 풍요로워졌다. 한 생명이 강낭콩 만한 형태로 뱃속에 자리 잡은 그 순간부터 함께 뛰어다니면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아이로 자라기까지 약 15개월 동안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고 배웠다.
그리고 풍요로운 삶은 단순히 아이와 부모, 세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모와 삼촌, 조부모, 증조부모 등)에게 전파되기에 작은 아이의 존재감은 실로 놀랍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