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갖는 게 망설여지는 수백 가지 이유들
아기가 돌이 지나고 걸음마를 떼고 슬슬 말귀도 알아먹어서 '오호라 이 정도만 돼도 애 키울 만 한데?' 싶어 지면 주변에서는("남자 친구는?" "결혼은?" "아기는?"을 물었던 바로 그 주변!) "그래서, 둘째는?" 묻기 시작한다. 아니, 사실 주변에서 꼭 묻지 않아도 어느덧 신생아 티를 다 벗고 팔다리에선 미셸린 타이어 같은 통통함이 사라지는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분유 냄새 폴폴 풍기는 꼬물꼬물 신생아가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키우면서 반복적으로 '둘째를 낳을 것인지?'에 대해 갑론을박 논쟁(?)을 벌여왔고, 일단은 둘째를 갖는 방향으로 어느 정도 이야기가 된 상황이다.(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니까 늘 뒤집힐 가능성은 열어두도록 하자)
그러던 중 브런치에서 '내가 둘째를 낳을 수 없는 이유'라는 글을 읽고,
어찌 보면 무모하고 용감하게도 둘째를 낳겠다고 결심하고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운 사람으로서,
나는 왜 둘째를 낳겠다고 결심했는지? 과연 제대로 따져보고 좋은 결정을 한 것인지?
나의 결정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아가씨 시절부터 지나가는 아기들만 봐도 웃고 어르고 인사하기 바빴던, 자타공인 아기 덕후 나는 구 남친(현 남편) 역시 아이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마음속으로 가산점을 주기도 했으며, 결혼 전 우리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애는 셋쯤 낳으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막상 지난해 아기가 태어나고 육아의 현실을 마주한 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어디 가서 '육아 너무 힘들어서 못해 먹겠어요'라고 불평하기도 민망한 이 시대의 꿀 육아인이다.
- 우선, 여유 있는 경제 사정으로 (엄격한 의미에서 워킹맘도 아니면서) 출산 후 지금까지 시터의 도움을 받고 있다. (여기서 마음에 드는 시터를 만나기까지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시행착오와 누군가를 고용하면서 발생하는 막대한 스트레스는 논외로 하자)
- 길 건너 사는 엄마 아빠가 물심양면으로 손주 양육을 지원하신다. (첫 손주에 대한 사랑에 더해 나약한 멘탈을 가진 딸에 대한 애프터서비스 차원이랄까) 시터가 없는 평일 저녁시간과 주말을 도와주는 부모님 덕분에 지금까지도 나는 무시무시한 독박육아를 감당해야 할 일은 거의 없었다.
- 훌륭한 육아 동지인 남편은 잠귀가 어두워 신생아 시절 밤 케어를 도와주지는 못했지만, 기본적으로 섬세하고 센스 있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늘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 본인보다는 내가 힘들다는 점을 인정하고 고맙게 생각하며,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를 잘 표현한다.
- 마지막으로 우리 아기는 순하다. 태교를 잘해서인지, 타고난 성정 탓인지 모르지만, 기본적인 욕구만 충족되면 만사 행복한 해피베이비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고 잘 웃고 애교도 많다.
그렇다면 대체 나는 왜, 무엇이 힘들었을까?
나는 타고나기를 상당히 건강한 체질인 데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꾸준하게 운동을 한 지가 어느덧 6년 정도 되었다. 아마 동년배 중에서는 상위권에 드는 건강 상태와 체력일 것이다. 또 아주 빠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결혼과 초산 연령이 늦어지는 추세에 비했을 때, 아주 적당한 시기라고 볼 수 있는 나이(만 31살)에 출산을 했다.
그렇지만 만삭 임산부 시절부터 밤새 화장실을 가느라 두 번 이상 깨면서 시작된 '잠 못 이루는 밤'은 밤 수유를 하고 통잠을 자지 않는 아기를 돌보면서 계속되었고, 나의 체력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우리 부부는 아기가 만 6개월이 될 무렵 방 분리를 했는데 이전까지는 거의 하루도 숙면을 취한 기억이 없다)
사실 잠을 차치하고라도 임신과 출산, 모유수유를 하는 일련의 과정은 엄마의 피와 살을 깎아서 아기를 키우는 시간들이다. 감사하게도 임신 기간에 크게 고생을 하지 않았던 나도 출산을 하고 '내가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며,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구나'를 뼈 저리게 느꼈는데..
쉽게 지치고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피로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진 뱃살, 주체할 수 없이 빠지는 머리카락, 모든 양분이 빠져나간 것처럼 건조하고 생기 없는 피부, 조금만 찬 기운이 돌아도 시린 무릎과 시큰한 손목, 이 모든 외적인 변화들이 슬프고 무서워서 찾아오는 우울감까지.
나에게 나보다 중요한 존재가 생겼다는 것? 아니, 정말 내가 나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라기보다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고 요구하는 존재가 생겼다는 편이 맞겠다.
출산 전에 맘카페에서 '모두에게 공주 대접을 받던 임산부 시절이 그리워서 둘째를 가져야 하나 고민한다'는 글을 보고, '아니 뭐야? 평소에 얼마나 대접을 못 받고 살았으면 저런 생각을 하지?' 싶었다. 하지만 아기를 낳고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임신을 하면 대체로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유리그릇처럼 조심스럽게 다뤄지게 마련이다. 평소 귀하게 대접받고 충분히 사랑을 받던 여자라도 더 큰 애정과 관심을 받게 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임산부 시절이 끝나고 예비 엄마에서 실제 아기 엄마가 되는 순간, 주인공은 아기가 되고 온 지구는 아기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한다. 이제 엄마는 아기에게 젖을 주고 아기를 안아주고 아기가 불편하지 않도록 돌보는 사람이 된다. 순식간에 공주에서 무수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뱃속에 열 달 품고 있었다는 이유로 갓 태어난 아기를 대하는 일이 엄마에게 쉬울 수는 없다. 엄마에게도 아기는 낯선 존재고 아기를 다루는 일은 어렵다. 아기의 침과 젖이 여기저기 묻어 있고 목이 늘어진 수유복을 입은 채 머리를 추노처럼 풀어헤치고, 기저귀를 갈고 젖을 먹이고 재우고를 반복하는 것도 힘들지만, 엄마를 더 힘들고 외롭게 하는 건 세상의 시선이다.
세상이, 특히 대한민국이 얼마나 엄마들에게 야박하고 demanding 한 지, 아기를 낳고 나서야 알았다. 엄마들이 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은 참으로 어이없게도 당연시된다. 엄마라는 존재는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모성애가 넘칠 것이라고 가정하고(그래야만 한다고 강요하고), 아기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사람으로서 아기가 먹고 자고 배우고 자라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에 대한 책임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엄마에게 주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느 정도의 희생과 고통은 엄마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경우, 지금의 아빠들은 30년 전 우리 아빠들보다 적극적으로 육아에 참여한다. (엄마들이 경제활동에 기여하는 부분을 보면 당연하지만) 바쁜 직장생활을 하느라 기저귀를 갈거나 목욕 한 번 시키지 않았던 어르신들은, 퇴근 후 아기를 어르고 분유를 타서 먹이는 젊은 아빠들을 좋은 남편이나 훌륭한 아빠라고 치켜세운다. 그렇지만 아빠만큼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내로라하는 직장을 다니다가 이 모든 걸 잠정 중단하고 엄마 역할을 떠맡게 된 여자가, 내 아기를 먹이고 재우고 보살핀다고 칭찬받는 경우는 드물다.
사람들은 묻는다. "남편이 육아 많이 도와줘요?"
도와주냐고? 도와줘? 질문 자체가 얼마나 우스운가? 육아는 기본적으로 엄마의 책임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에 남편은 육아를 자발적으로 해야 하는 주체가 아닌, 엄마를 돕는 보조자로 취급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