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닐라라떼 Jan 08. 2024

목숨을 걸었던 출사

출사에도 무용담이 있다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는 90% 이상이 뻥이다. 군대 다녀오기 전에는 이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전역을 한 후 자취방에서 미필자 후배들을 앉혀놓고 1시간 동안 있지도 않았던 무용담을 늘어놓는 나 자신을 보며 내가 바로 그 사람이구나 싶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 소개하는 나의 이야기는 뻥이 아니다. (아, 20%정도는 과장이 섞일 수도 있겠다) 사진 생활을 하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출사 이야기를 소개해 볼까 한다.


2008~2009년은 내 사진생활 중 나름 가장 역동적이던 기간이었다. 나홀로 출사도 많이 다녔다. 찜질방에서 하루를 묵으며 광양, 청송, 창녕 등 전국을 다니기도 했다. 장비들이 꽤 무거웠을텐데 그런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설레던 마음만 강렬하게 남아 있다. 돌아보면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유명 사진사들이 다녀간 출사지는 나도 가보려고 노력했다. 그 중 한 곳이 '우음도'였다. 우음도는 시화방조제 건설로 바다가 육지가 된 곳이다. 각도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지평선 (부분적인 구도에서이지만) 촬영도 가능한 장소이다. 무엇보다 황량한 억새 벌판 가운데 드문드문 자라난 왕따 나무들이 아련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이었다. 사진 사이트에서 우음도를 배경으로 한 사진들을 볼수록 가고싶은 마음이 커졌다. 매우 추운 1월의 겨울이었지만 혈기를 누르지 못해 토요일 새벽 출발 계획을 세웠다.





당시는 스마트폰이 이제 막 대중화되던 시기여서 T맵이나 카카오맵처럼 길 안내에 우수한 어플이 없었다. 여전히 운전시에는 대시보드에 얹혀진 네비게이션이 중요했다. 손톱으로 목적지를 톡톡 찍고 새벽 3시 반 졸린 눈을 부릅 뜨며 한겨울 밤길을 달렸다.


1시간 반 가량이 지나자 목적지가 가까워졌다. 아직 바깥은 어둑어둑 했기에 길을 잘 봐야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라는 음성이 나온 곳은 기와집들이 군데군데 있는 시골 마을 한복판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인터넷에서 보던 우음도의 광경은 없었다. 차문을 열었는데 앞집 대문에서 갑자기 큰 개가 컹컹 짖으며 뛰쳐왔다. 얼른 들어왔다. 다시 시동을 걸고 인근을 한 바퀴 돌았으나 소득이 없었다. 네비게이션 정보 오류였다. 새벽이라 어디 물어볼 사람도 없고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이 길 저 길을 다녀본 끝에 저 멀리 보이는 넓은 벌판을 발견했다. 아, 저기다 싶어 그쪽으로 차를 몰았다. 우음도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막상 내리고 보니 입구가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차를 세운 곳은 지대가 좀 높았다. 벌판은 아래에 있었는데 눈을 들어 멀리 둘러봐도 입구처럼 보이는 곳이 없었다. 해가 서서히 뜨고 있었다. 일출 광경도 찍으려 했기에 마음은 바빠져서 1.5층 정도 높이인 둑을 타고 그대로 내려와버렸다.


설레는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두 번째 장애물이 나타났다. 철조망이었다. 이런 곳에 웬 철조망인가. 내가 들어온 곳이 공식적인 입구는 아님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일출 광경을 앞에 두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결국 장비가 들어있는 배낭을 철조망 너머로 살짝 던진 후 낮은포복으로 철조망을 통과했다. 전역 후 9년만에 해보는 낮은포복이었다.


어쨌든 웬만한 장애물은 다 넘었다. 복잡한 마음은 잊어버리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와! 인터넷으로 보던 것 이상의 장관이 펼쳐졌다. 황량하고 드넓은 광야, 군데군데 솟아난 억새와 나무들, 멀리서 빨갛게 올라오기 시작하는 아침 해. 늦지 않았다. 나는 배낭을 메고 정신없이 뛰며 셔터를 눌렀다.

2010, 우음도


좋은 장소에 오니 결과물도 신기하고 남달랐다. 동호회 분들이 주로 포스팅한 포인트를 찾아 사진을 찍어보기도 했다. 바다를 메운 곳이라 그런지 바닥에 조개껍데기도 보였다. 금새 150컷을 넘겼다.

2010, 우음도

인터넷을 보면 왕따나무 아래 누군가 갖다놓은 낡은 소파를 모델과 함께 찍은 사진들도 꽤 있었다. 그곳을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내가 진입로를 잘못 택한 탓인지 보이지 않았다. 무진장 넓은 곳에는 이 새벽시간 나 혼자 뿐이었다. 나는 한겨울 추위도 잊은 채 말할 수 없는 자유로움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인기척이었다. 뒤에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휙 고개를 돌려봤더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내 느낌은 꽝이라 생각하고 무시했다. 걷다 보니 전방에 내천이 흐르고 있었다. 폭이 좁아 개울이라 불러도 될 듯 했지만 아무리 보아도 점프해서 넘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방향을 틀어 폭이 좁아지는 곳을 따라 올라갔다. 예상보다 꽤 올라가야 했는데 정말 아슬아슬한 너비의 개울물을 뛰어 건넜다.


2010, 우음도


이곳은 얼마나 넓은 곳일까. 사방을 살펴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슬슬 찍히는 결과물도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해도 상당히 올라와서 추위도 누그러든 느낌이었다. 이제 돌아가며 나머지 촬영을 해볼까 생각했다.


2010, 우음도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내가 출발했던 곳이 보이지 않았다. 아뿔싸, 생각없이 너무나 멀리 온 것 같다. 그러나 대충 방향은 알고 있으니 그쪽으로 가다보면 뭔가 나올거라 생각했다. 해가 뜨고 나니 살얼음들이 녹아 바닥이 질퍽거리기 시작했다. 원래 바다였던 곳이니 지반이 단단하지는 않는 것이 정상이긴 했다.


아까 왔던 길과는 다른 코스로 돌아갔었는데 또다시 작은 개울이 등장했다. 살짝 내리막이기도 하고 이번에는 충분히 뛰어 건널 수 있는 너비였다. 심호흡을 한 후 점프를 했다.


그 순간! 착지한 내 두 발바닥에 퍽 하는 느낌이 들었고, 뒤이어 몸이 땅 밑으로 쑤욱 들어가는 것이었다. 발끝에서부터 차가운 느낌이 올라왔다. 개울 옆 웅덩이 물이었다. 아침 햇살에 약해진 살얼음 표면이 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깨진 것이다. 1초도 안되는 시간에 나는 몸이 허리까지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즉시 손을 뻗어 뭐라도 잡아야 했지만, 나는 미련스럽게도 장비가 젖을까봐 그것을 들고 있던 오른손을 하늘 위로 높이 치켜올렸다. 다행히 웅덩이는 깊지 않아 배꼽 이상은 몸이 내려가지 않았다. 허겁지겁 그곳을 빠져나왔다. 바지 전체와 상의 절반은 쫄딱 젖었다. 온 몸이 추워졌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제 풀숲으로 뒤덮인 바닥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내가 출발했던 곳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얼른 배낭 속에 카메라를 집어넣고 뛰기 시작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운동화에서 차가운 물이 새어나왔다.


그 와중에 아까 느꼈던 인기척이 다시 뒤통수에서 감지되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낯선 생명체가 있었다. 고라니였다. 열 걸음 되는 거리에서 그놈은 나를 호기심 반 경계 반 표정으로 갸우뚱거리며 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나를 따라오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이곳이 관광지가 아닌 야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였으면 신기했을 일이, 이런 사고(?)를 겪다 보니 공포심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출사 준비를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음도에 백골만 남은 신원미상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도 갑자기 기억났다. 만약 여기서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은 시체도 못 찾을 것이었다. 혼자 살던 때였고 이곳에 온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인적 드문 황야에서 무언가를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2010, 우음도


그 때부터 아무 생각 없이 뛰기만 했다. 한 번 뒤를 돌아보았는데 이번엔 고라니 두 마리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찔했다. 사람살려 하는 마음으로 줄행랑을 쳤다. 한참을 뛰자 그제야 내가 통과해온 철조망이 보였다. 다시 낮은포복으로 그곳을 통과했다. 손을 뻗어 높은 둑을 기어 올라왔다. 타고 온 차가 내 앞에 있었다. 도착했다. 살았다.


일단 흠뻑 젖은 운동화부터 벗었다. 트렁크에 다행히 슬리퍼 한 켤레가 있었다. 그러나 여벌의 옷은 없었다. 하의는 속옷 빼고 몽땅 벗었고, 나는 그렇게 하의실종(?) 상태로 운전을 해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1시간 정도는 멍하니 있다 잠이 들었다.


이것이 나의 죽을 뻔한(?) 출사 무용담이다. 사실 제목부터 과장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공포심이 엄청났다. 요즘처럼 GPS가 있는 스마트폰이 있다면야 상황이 나았겠지만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출사지 방문은 잊지 못할 이야기 하나를 선사해 주었다.


2010, 우음도




우음도를 다시 찾은 것은 4년 후였다. 똑같은 새벽이었다. 이번엔 네비게이션이 정확한 입구로 안내를 해 주었다. 우음도의 공식적인 입구를 통과하고,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까지 터져 있는 모습을 보며 새삼 과거의 기억이 쓰라림으로 올라왔다. 얼마 걷지 않아 반가운(?) 고라니들을 만났다. 그 때 녀석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내 쪽에서 놀라지 않았다. 자기들이 알아서 도망을 갔다.


2014, 우음도


한 번 시행착오를 겪은 곳이니 나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굳이 멀리가지 않고도 사진이 잘 나올만한 포인트에 멈춰서서 충분히 원하는만큼 찍었다. 전에는 한겨울(1월)이었고, 금번에는 초겨울(11월)이었는데 두 번째가 더 추웠다.


여유있게 도착했기에 동이트는 시간도 기다릴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누가 찍어도 멋지게 나오겠지만 아무튼 두 번째로 간 출사 사진들이 더 만족스럽긴 했다. 혼비백산할 경험을 한 후 다시 찾아온 출사지는 여러 측면에서 익숙했다.

2014, 우음도


지금은 우음도가 어떤지 모르겠다. 당시 DSLR의 폭풍적 인기가 아니었다면 일반인들은 알기도 힘든 곳이었겠지만, 10여년 전에는 해가 다르게 방문객들이 늘던 분위기였다. 이국적이고 뭔가 고독한 분위기도 출사의 매력을 더해준 곳이다. 나에게 있어, 발품을 팔아 찾아야 하는 출사지 중에서 두 번 방문한 곳은 이곳 뿐이다. 사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더 가고싶긴 하지만 이제는 그럴 여유도 체력도 없다. 그래서 하드디스크에 남아있는 사진만 넘겨보고 있다.


2014, 우음도


우음도로 가는 길은 편하지 않다. 서울 인근에서라면 대중교통은 아마 몹시 힘들 것이다. 그래도 이런 풍경들은 한 번쯤 홀로, 혹은 연인이나 가족들과 함께 찾아가도 충분히 매력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두 번 다 겨울에 갔지만 날씨가 좋은 계절에 찾는다면 금상첨화이리라. 아, 시간은 가급적 일출이나 일몰 즈음을 추천한다. 사진가들이 홀릭하는 시간대이기도 하지만 우음도는 특히 이 시간에 매력을 보이기 때문이다.


쓰고 보니 과장은 1도 없다. 진심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