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국가 속에 싹트는 위험요소
지난 글에서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따라가며 정치체제의 변화를 살펴보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스라엘은 씨족 지파 동맹 체제로 살아왔고,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신정체제를 유지했습니다. 민족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사가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외부의 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이러한 체제는 오래도록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중앙집권화된 블레셋 민족의 무서움을 경험하자 이스라엘도 왕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사울이 초대 왕으로 세워졌지만 그는 기존 이스라엘의 질서를 거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카리스마가 바탕이 된 리더였던 것입니다.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은 죽게 되고 이스라엘은 다시 위기에 빠집니다.
그러던 이스라엘에 다윗 왕이 등장합니다. 다윗 왕은 블레셋의 위협을 영원히 무력화시키고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정복하며 주변 국가를 속국으로 만드는 등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듭니다. 뿐만아니라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여 이스라엘을 진정한 왕정 체제의 통합 국가로 발전시킵니다. 확장된 영토를 바탕으로 한 무역은 경제적으로도 커다란 부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의 풍요를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에 이르러서야 이스라엘에는 진정한 '국가'라는 왕정 체제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스라엘에 전무후무한 강함과 부요를 안겨주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했고, 그 나라의 이미지 속에는 다윗(새로운 다윗)이라는 인물이 빠질 수 없게된 것입니다.
폴 존슨은 「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라는 책에서 왕정 체제로 넘어가는 시기의 다윗과 솔로몬을 비교합니다. 다윗은 고난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왕이 된 후, 중앙집권 체제의 필요성을 느꼈으면서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 체제가 약화되지 않도록 많은 고민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동시대 이방 왕들의 독재정치를 모방하지 않으려 했고, 이스라엘을 완전한 왕정 국가로 바꾸기를 주저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인구조사(세금 징수의 전 단계라 할 수 있는)를 시행하고 자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24장). 또한 그가 숨을 거둘 때 아들 솔로몬에게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따를 것을 명령하는 장면도 바라보게 됩니다.
... 너는 훌륭하고 용감한 지도자가 되어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잘 지켜라. 그분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고, 율법에 복종하며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만 하여라. 모세의 율법에 적힌 것을 지켜라. 그렇게 하면 너는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하신 약속, 곧 '네 자손이 내 말을 잘 따르고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왕이 네 집안에서 끊이지 않고 나오게 하겠다'라고 하신 약속을 지켜 주실 것이다. (열왕기상 2:2~4, 쉬운성경)
다윗은 그의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죄를 뉘우칠 줄 알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후계자 솔로몬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속속들이 자신이 속한 세상과 그 시대의 자식이었지요. 그는 하나님의 통치원리를 무시한 채 망설임없이 이스라엘 왕정 체제로의 전환을 진행시킵니다.
솔로몬은 이방의 문화를 적극 수용하며 강하고 화려한 이스라엘을 만들었지만, 번영과 함께 '위험 요소'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의 개인적 죄악 차원(이방 여자들과 정략 결혼을 했거나, 배교한 사실 등)에 머물러 논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월터 브루그만의 저서 「예언자적 상상력」(복있는 사람)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려 합니다.
월터 브루그만은 왕정 체제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솔로몬 시대가 정의와 신앙의 관점에서 퇴보했다고 단언했으며, 세 가지 차원의 내용을 짚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풍요 이면에는 '빈부격차'라는 어두움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먹고사는 문제로 걱정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는 왕국의 수도에 집중되어 있었고, 소외된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정정치에 부합하는 사회로 진보하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둘째, 웅장한 궁궐과 성전 뒤편에 '강제 노역'이라는 억압의 정치가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 그리고 그보다 훨씬 거대한 규모로 건축한 궁궐은 막대한 노동력을 동원한 결과였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의 성을 재건하는 등 끊임없는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강제노역에 왕조 지파인 유다만 제외된 것은 다른 지파의 박탈감을 더욱 부추겼죠. 강압적인 정치와 무리한 건축으로 정의와 긍휼의 정신은 희미해져갔고, 백성들의 원성은 끓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르호보암 왕 때에 이르러 이스라엘이 분열되는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다 근본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역할이 국가의 수호신으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브루그만은 이를 '하나님을 포로로 잡은 종교'라고 표현합니다) 국가지원적 종교가 공식적으로 창출되었고 이러한 종교는 국가를 위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국가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를 신성시하게 되어버린 것이지요.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브루그만의 글을 직접 인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대기(waiting) 상태'로 있으며, 그에게 접근하는 일은 왕실이 통제한다. 이러한 개편으로 말미암아, 서로 얽혀 있는 두 가지 요소가 힘을 얻게 되었다. 우선, 이 개편 때문에 초월적인 저항과 항의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 결과 왕에 대한 어떤 관념이라도 막힘없이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 편, 이제 왕이 독점권을 차지했으며, 그 결과 왕 주위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왕의 편에 서지 않고서는 결코 이 하나님께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는 왕에 대항하여 소요를 일으키는 울부짖음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 바로 여기서 마르크스의 본질적 비판이 딱 들어맞는다. 종교는 기존의 경제와 정치를 정당화하고 원활히 돌아가도록 밀어준다.
저자(John Bright) 역시 이러한 위험성을 강조합니다. 국가와 예배는 서로 통합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시온산의 산당은 하나의 왕적 기구였습니다. 국가는 예배를 지원하고 예배는 국가를 위해 존재합니다. 왕은 예배 의식에서 하나님의 (양자된) 아들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들이닥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가를 키우고 왕권을 공고히 하고 이방 민족과 교역을 활발히 하는 가운데 은밀한 위험 요소들은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은 이제 이방 제국의 양식을 완전히 적용시킨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러한 풍요 속에서 싹트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대한 착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완성된 '이스라엘 왕국'이 얼마나 많은 모순점을 갖고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출애굽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 '제사장 나라'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을까요? 여호와의 손으로 이루어짐을 기대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세속 문화로 가득찬 물질적 풍요와 화려함으로 만족되어버린 것이었을까요?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왕국을 하나님 나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그 국가 안에 그분의 나라를 세우셨다고 착각하지는 않았을까요?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의 문제였습니다. 초반부에 제가 영점 조정을 말씀드렸었지요?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꿈꾸고 갈망하던 '하나님의 나라' 이미지는 이런 차원에서 잘못 설정된 영점이 아니었을까요? 국가 분열 이후 왕과 백성들을 미혹하던 거짓 선지자들은 이와 같은 허탄한 낙관론으로 백성들을 미혹했고 선지자들의 말씀은 그것을 부수기에 무력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옛날 이야기로 끝낼 문제가 아닙니다.
저자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집니다. 거대한 성전과 왕궁이 있고 풍요와 안전이 보장되던 다윗 왕국... 하나님이 언제나 지켜주시던 그 나라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망했던 것처럼, 현대를 사는 우리도 그러한 나라를 지향하며, 만족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실제로 7~80년대를 거치며 하나님의 큰 복을 받았습니다. 경제는 획기적으로 성장했으며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단숨에 진입했습니다. 교회 성도 수도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고, 수많은 선교사들을 해외로 파송했습니다. 세계가 인정하고 알아주는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과거 아픔의 역사를 생각할 때 믿기 힘든 은총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을 냉정히 분석해 보면 -솔로몬의 실패와 같이- 우리는 그 복을 감당하기에 한없이 부족한 자였다는 고백이 나올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물질의 부요로 교회는 타락했고, 성도들은 바알을 섬기듯이 맘모니즘을 숭배하며, 뉴스에서는 목회자, 리더와 선교사들의 온갖 죄악과 비리가 공개되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보고 있습니다. 사회는 온갖 부조리와 불의가 판을 치지만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미약하기만 합니다.
일부 목회자나 성도들은 그 시대의 양적 성장을 회고하며, 하나님께서 '이만큼' 복주신 우리 나라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셨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가, 교회가 진정 하나님의 나라다운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측정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경제의 규모나 교회의 크기에 달린 것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물질의 축복이 따라올 수 있지만, 거꾸로 물질의 축복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충분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현재의 체제 하에서 제공받는 소득 증가, 소비의 기회, 인터넷 정보, 수많은 사회 인프라, 종교의 보장, 문화의 향유에 만족하여 그 이상의 고상한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에 관심을 멈춘 것은 아닐가요?
오히려 우리는 선물로 주어진 축복들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붙들며 살고 있지는 않는 것일까요?
설상가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 민족은 어떤 경우에도 항상 그분의 보호를 보장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들에 "그렇다"고 답해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 자신의 물질적 충족을 위해 이용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주시고 사랑하신 우리 대한민국'을 언급할 때, 교회의 규모나 경제적 풍요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질문이 이스라엘 안에서는 어떻게 답변이 되었을까요? 우리는 다음 시간부터 그것을 확인해 볼 것입니다.
▷ 2. 심판 아래 있는 이스라엘 국가(1) 에 이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