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등장과 이스라엘 국가의 변화
지난 글에서 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유대인들에게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 날에 여호와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유대인들을 구원하시고 적들을 심판하시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정신 속에는 이러한 개념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데, 그 핵심에 '다윗'이라는 인물이 있음을 지난 시간에 많은 성경본문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어떤 업적을 세웠길래 이스라엘 민족들의 소망 가운데 '다윗'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각인된 것일까요? 이를 위해 다윗 이전의 이스라엘 역사를 간략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어떻게 바꾸어 왔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최대한 어렵지 않게 설명드려야 할텐데 저도 긴장이 됩니다)
출애굽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들이 광야에서 40년간의 방황을 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은 훨씬 일찍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한 세대가 지나서야 그것이 허락됩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여리고를 시작으로 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정복한 땅은 열 두 지파에 고르게 분배됩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이스라엘은 "자 이제부터 이곳은 이스라엘 국가야"라고 선포하며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파간의 씨족 동맹을 맺고 살았으며 국가라는 체제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사기를 읽어 보셨지요? 주일학교 때부터 재미있게 들어온 왼손잡이 에훗, 여성으로서 이름을 날린 드보라, 소심한 영웅 기드온, 괴력의 장발 아저씨 삼손... 그들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어나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으로 열 두 지파를 구해냈습니다. 이처럼 그 시대의 이스라엘은 상황에 따라 사사라 불리우는 이들이 나타나 지파들을 지휘하는 체제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사들이 실질적인 왕 아니냐?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코 왕이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미디안의 손에서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을 구해낸 기드온을 살펴봅시다. 그가 삼백 용사와 더불어 적들을 쳐부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에게 왕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를 다스리십시오. 당신과 당신의 자손들이 우리를 다스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나와 내 아들은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사기 8:22~23, 쉬운성경)
이와 같이 사사들은 이스라엘을 지휘했지만, 결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는 '지파적 신정정치', 즉 열 두 지파가 하나의 동맹체로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리심을 받는 시대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엄격하고 굳건한 형태로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지파 동맹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다름아닌 블레셋이라는 민족의 도전이었습니다. 후기 청동기의 가장 약탈적인 해상 민족이었던 블레셋은, 과거 이스라엘이 점진적으로 쫓아냈거나 노예로 삼았던 가나안 원주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철제 무기를 사용했고 봉건 군대를 거느린 귀족정치 아래 엄격한 훈련을 받고 조직되었습니다. B.C 1050년경 블레셋 족속은 당시 이스라엘이 주로 점령했던 내륙 산악지대를 향해 엄청난 대이동을 감행합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피할 수 없는 충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충돌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박살이 나고 맙니다. 이스라엘은 첫 번째 전투에서 4천명, 두 번째 전투에서는 3만명을 잃는 처참한 패배를 경험합니다.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사무엘상 4장 참고)
위의 그림은 베델성서연구 교재(컨콜디아사)에서 가져온 그림입니다. 그림 하나 하나가 이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체계화된 해양민족의 군대가 보이고 그들 앞에는 위엄있는 왕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군인은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 가지고 있습니다. 응집력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허둥지둥 도망가기 바쁩니다. 카리스마 리더십은 실패했고 여호와의 백성들은 짓밟혔습니다.
왼쪽 아래에 있는 사람 머리 위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보이시나요? 네, 왕이 보좌에 앉아 있는 그림입니다. 국가 체제를 갖춘 블레셋에 유린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앙집권화된 왕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다스릴 왕이 필요합니다. 왕이 있으면 우리도 다른 모든 나라들과 같게 됩니다.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릴 것입니다. 왕이 우리와 함께 나가서 우리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사무엘상 8:19~20, 쉬운성경)
지파 동맹 체제가 익숙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정으로의 전환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요. 그러던 가운데 중재자 사무엘을 통해 세워진 첫 왕이 -잘 아시듯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신장이 장대하고 용모가 준수했으며(사무엘상 9:2, 10:23) 아주 용감했고(11:1~11), 온순했으며(9:21) 관대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11:12~13). 우리는 사무엘상을 통해 사울 왕이 팔레스타인 심장부를 장악하고 있던 블레셋을 물리친 최초의 승전(13~14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사무엘로부터 책망받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왕이 된 사울이 지파 동맹 체제의 이스라엘을 어떻게 바꾸었냐는 것입니다. 왕이 세워졌으니 이제 이스라엘은 완전히 달라진 것이었을까요? 일단 대답은 '아니오' 입니다.
사울은 왕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옛 질서를 거의 바꾸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껍데기는 왕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사사처럼 세워진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다는 것이지요. 사울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구조를 거의 변경시키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결집을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국가를 창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울 체제에서는 행정 조직도 없었고 세금을 징수하지도 않았으며 궁전도 -그것을 궁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몹시 초라했습니다.
더구나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총공격을 해 온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은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전사하고 맙니다(정확히는 자살). 그것으로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은 사라졌습니다. 블레셋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획득했고 그들의 군대는 그 땅에서 더욱 강력하게 진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다시 어두운 밤이 찾아온 것이지요.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을 극적으로 역전시킨, 그리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절정의 영광을 가져다 주었던 인물입니다. 다윗이 어떤 인물인가는 굳이 길게 설명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는 사울의 궁정에서 총애를 받았던 신하였고, 거인 골리앗을 죽인 영웅이었으며 백성들의 칭송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의 질투를 받아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나중에 블레셋으로 망명을 해야 할 정도로 위기를 겪었습니다.
사울이 죽자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를 지배하는 왕이 됩니다(사무엘하 2:4). 곧이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죽자 다윗은 이스라엘 전역을 통치하는 왕이 되었습니다(사무엘하 5:1~5). 저자는 다윗 역시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세워졌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사울이 왕으로 다스리고 있던 시대부터 다윗은 이런 명성을 얻습니다.
여자들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울이 죽인 적은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적은 만만이라네." (사무엘상 18:7, 쉬운성경)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있었지만, 백성들은 그에게 카리스마가 없었다고 판단했고 헤브론의 왕인 다윗을 추대했습니다. 즉, 다윗 왕정의 시작도 사울이나 옛 사사들과 같은 리더십에 근거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윗은 왕이 되자 이스라엘을 전적으로 변혁하려는 일련의 조치를 취합니다. 이것을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위협을 '영원히' 물리쳤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분열이 수습된 직후를 노려 예루살렘을 두 차례 침공하는데, 이 전쟁에서 오히려 다윗이 승리합니다. 이후로부터 다윗은 연전연승을 거듭하여 그 대단하던 블레셋을 이스라엘에 종속시킵니다.
통일국가의 필요성을 깨달은 다윗은 예루살렘을 새로운 수도로 정했습니다. 왜 굳이 예루살렘이냐?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남과 북의 중심에 위치한 도시로서, 어느 한 지파의 소유지가 아니었습니다. 수도가 어느 지파에 속해 있다면 모든 지파를 결집시키는데 방해가 되었겠지요? 다윗은 그곳을 직접 점령하여 '다윗 성'이라는 명칭을 붙입니다(사무엘하 5:6~7).
뒤이어 그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혀온 다른 가나안 도시들을 하나씩 굴복시켜 국가에 합병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모압, 암몬, 그리고 에돔의 족속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조공을 받았으며 아람국가까지 공략함으로써 엄청난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정복은 유례가 없는 경제적 번영의 기반을 닦아 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북방 페니키아 연안까지, 그리고 다메섹에서 헷야즈에 이르는 무역로를 장악하였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서는 두로의 히람 왕의 도움을 받아 해외 무역을 확장했고, 시바의 여왕도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이전이나 이후에는 결코 맛볼 수 없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귀는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절정이 됩니다.
솔로몬은 해마다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를 세금으로 받았습니다. 그것 말고도 무역업자와 상인들이 바치는 금과 함께 아라비아 왕들과 이스라엘 땅의 장관들이 바치는 금도 받았습니다. 솔로몬 왕은 금을 두드려서 큰 방패 이백 개를 만들었습니다. 방패 하나에 들어간 금은 육백 세겔이나 되었습니다. ... 솔로몬 왕이 마시는 데 쓰는 모든 그릇은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레바논 수풀의 궁'에서 쓰는 모든 그릇도 다 순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은으로 만든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솔로몬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솔로몬은 이 세상의 어떤 왕보다 재산이 많았으며 뛰어난 지혜를 갖고 있었습니다. ... 솔로몬은 전차와 말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전차 천사백 대와 전차를 모는 사람 만 이천 명을 두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그들을, 전차를 두는 성과 예루살렘에 두었습니다. 솔로몬이 왕으로 있는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은이 돌처럼 흔했습니다. 그리고 백향목은 언덕에서 자라는 뽕나무처럼 흔했습니다. (열왕기상 10:14~27, 쉬운성경)
자, 이러한 모든 것을 만들어낸 사람이 누구인가요? 다윗입니다. 지파를 통합시킨 이도 다윗이었고 왕정과 군사 체제를 만든 이도 다윗이었습니다. 이후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세금이 징수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카리스마는 왕권 체제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 카리스마는 예루살렘에서 지도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세습 왕조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옛 질서는 이제 남아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바뀐 것이지요.
이와같이 다윗이 만든 '국가'는 이스라엘에 황금시대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시대를 다시 맞이하지 못합니다. 문학과 문화가 그때만큼 번성한 적도 없었습니다. 유례가 없는 물질적 번영이 있었습니다. B.C 10세기에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충분히 프라이드를 가져도 되는 배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 가운데 다윗 왕국은 이제 잊을 수 없는 시대가 됩니다.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은 그들이 꿈꾸었던 그 어떤 국가보다 행복한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기름부으신 왕을 통해 그의 나라를 수립하셨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고난의 시대가 이르면 다윗 시대의 "그 행복했던 옛날"을 향수에 젖어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이 장차 도래할 메시야를 생각할 때, 다시 태어난 다윗, 곧 새로운 다윗을 제외하고는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다윗의 이미지는 유대인들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새로운 다윗이 와서 부강과 변영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날인 것입니다.
▷ 1. 하나님의 나라와 이스라엘 국가(3) 에 이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