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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Jul 16. 2019

8. 두 세계 사이 : 하나님 나라와 교회(2)

지금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

※ 표지그림 : 「설교하는 베드로」, Jan Styka


 이제 우리는 결론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의도하셨던 그 분의 나라는 이스라엘의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소망으로 이어졌고, 결국 메시야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에게는 구체적이지 않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구세주이신 예수가 오셨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그는 이사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고 소외된 이들을 섬기셨으며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한 사람의 사역과 희생과 부활이) 하나님의 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메시야를 보내셔서 어떤 것을 의도하신 것일까요?



기적을 베푸신 목적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들을 되짚어 봅시다. 특별히 그가 베푸신 기적들 중심으로 말입니다. 어떤 사건들이 기억나시나요? 빵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겠지요(마가복음 6:35-44).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은 이를 바라보던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요한복음 11장). 요한복음에서는 선천적으로 맹인인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맹인은 눈을 뜨게된 후 바리새인들의 추궁에 매우 흥미로운 대답을 합니다.


 ...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그 사람이 나의 눈을 고쳐 주었는데도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니 말입니다 ... 나면서부터 앞 못 보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을 들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9:30-33, 쉬운성경)


 그 뿐만이 아니지요. 수많은 절름발이와 나병환자, 죽을 병에 걸린 자들이 예수를 만나고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복음서에서 베풀어진 예수의 기적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왜 이러한 이적들을 베푸신 것일까요? 

 확실한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와 예수의 의도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중들은 예수가 이러한 기적들을 더 많이 일으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무언가 보여주고 나신 후 서둘러 숨어버리시거나(마가복음 6:45) 엉뚱한 이야기로 백성들을 실망시키셨습니다(요한복음 6:60). 이러한 모습들은 예수께서 기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계신지를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몇 가지 말씀들을 더 찾아 봅시다.



(1)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께서는 거지 나사로와 한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나사로는 비참한 삶을 살았던 밑바닥 인생이었고 부자는 날마다 사치하며 호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세월이 지나 둘 다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불구덩이 속에서 이생을 맞이하게 됩니다. 부자는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요청합니다.


 ...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누가복음 16:27-28, 개역개정)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을 주목해 봅시다.


 ...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6:31, 개역개정)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등골 오싹한 말씀이 아닙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서 "나는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고 외치고 다닌다면 거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이 인간의 회개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모세의 율법, 즉 말씀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는 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 앞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예수께서는 기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효과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끄는데 기적은 절대적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2) 오병이어의 기적

 요한복음 6장은 예수께서 빵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서술합니다. 이 기적으로 백성들은 열광했고 "이 사람이야말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6:14)며 예수를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바다를 건너 피하셨지만 무리는 끝까지 그를 따라왔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들에게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내가 행한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26, 쉬운성경)


「오병이어의 기적」, Giovanni Lanfranco


 예수께서는 백성들의 가난과 어려움을 아셨음에도, 그들의 필요를 모두 채워주는 것이 그들을 위한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양식이 충족되기만 한다면 그것을 베풀어주는 이가 누구인지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를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오히려 피하셨고, 오히려 기적 앞에서 보이는 그들의 동기와 태도를 지적하셨습니다.

 유명한 기독교 작가인 필립 얀시는 그의 저서에서 "기적은 중독을 낳는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기적은 우리에게 충격과 놀람을 주지만, 이후 그보다 더 큰 기적이 보여지않는다면 더욱 큰 실망과 완악함이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는다는 것이지요. 모든 이들에게 기적으로 먹을 것을 베푸신 것은 예수의 자비였지만, 동시에 그분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기적은 사람들을 무한정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지만 오히려 믿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위험이 큽니다.



(3) 귀신의 힘을 입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이번에는 누가복음 11장입니다. 예수께서 벙어리 된 사람에게 다가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몇 사람이 의심하여 "저 사람은 귀신의 왕 바알세붑의 힘으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낸 것이다."(15절)고 주장합니다. 예수께서는 이에 반박하시며 "내가 귀신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면, 귀신들끼리 분쟁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힘을 쓰겠느냐? 사탄의 나라는 그렇게 약하지 않다. 그들은 일치단결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 주목해 봅시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1:20, 개역개정)


 이 말씀은 이번 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벙어리 된 사람으로부터 귀신을 내쫓으신 것을 단순한 치료 차원으로 보시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에게 임한 사건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스라엘은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보려 했지만 그것은 국가라는 허울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항하고 그 보호를 벗어나려는 내면의 죄악은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노력할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헤어나올 수 없는 죄악의 늪 가운데 메시야 예수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꾸짖고 말씀하시자, 인간을 결박했던 질병과 광기와 죽음과 죄의 지배력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사단의 통치 대신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습니다. 하늘 나라의 능력이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왔고 사단의 나라는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을 지배하던 권세에 균열이 생기며 우주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 여기 임한 하나님의 나라


 따라서 예수가 베푼 이적은 자신을 알리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목적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나라가 현재의 나라 속에 침투해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예수는 기적들을 통해 하나님의 강력한 통치가 죄의 권세를 이기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는 표징을 보였습니다. 그 기적을 경험한 이들은 이미 천국의 능력을 맛본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서의 신앙과도 일치합니다. 신약성서의 교회는 예수의 이적들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죄의 사슬을 끊어버릴 새로운 통치가 임했고 하나님의 나라는 더이상 미래 시제일 수 없습니다. 그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린 예수」, 램브란트


 복음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신앙고백도 여기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나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오심으로 인해 그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통치는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세상은 강력한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것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도 마귀의 나라 가운데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곳곳에서 죄의 속박이 풀리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임하는 사건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병자나 귀신들린 자가 온전케 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단의 명령대로 움직이던 사람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다스리심에 복종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미천하고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그 나라의 확장은 진행될 것이며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겨자씨처럼, 작은 누룩처럼 보잘것 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자라서 온 땅을 뒤덮을 것입니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13:31-33,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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