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함께 달려온 "하나님의 나라" 라는 주제의 결론 장입니다.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 씨족 지파 공동체로부터 왕정 국가를 거쳐 멸망, 포로기 그리고 메시야이신 예수를 통해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인 신약 교회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저자는 마지막 장인 9장에서 현대 교회에 초점을 맞춥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시며 승천하신 후 2천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임박한듯한 재림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그 나라의 완성은 지연된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때와 시일은 아무도 알 수 없고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은 마지막 때를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종말의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에 합당하게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 이 질문에 명쾌하게 '예'라고 답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저질러온 교회의 죄악상들을 보아도 그러하고 지금 이 시간에도 매스컴을 장식하는 성도와 목회자들의 범죄 소식들은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의 위기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요? 저자는 그것을 '종말론적 긴장의 부재'에서 찾습니다. 확실히 초대 교회에는 구주가 곧 다시 오시리라는 임박감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절제했고 재물을 나누었으며 소망 가운데 예배했습니다. 반면 현대 교회는 이러한 긴장을 잃어버렸습니다. 교회는 안주하며 재물을 쌓기 시작했고 성도들은 하늘의 소망보다 세속의 풍요를 누리려 합니다. 이스라엘의 계승자인 교회의 정체성, 참된 남은 자, 새 언약의 백성, 고난의 종의 사명, 종말론적 공동체 ...... 이러한 개념들은 이제 이질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쌓은 물질주의와 기술 편의로 지상의 천국을 건설했고 그것이 교회의 정체성과 함께 갈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새로운 지옥일 뿐임을 단언합니다. 물질적 안일함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추가하지 않는 사회는 과거 이스라엘 국가가 그랬듯 심판 아래 있을 따름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절망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성도들이 '하늘의 신령한 복'(에베소서 1:3)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좋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 나라의 질서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현대 사회의 이기와 기술이 매력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본질적 공허함을 채워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인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나라를 욕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모르는 것일까요? 저자는 우리가 우상숭배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고대 사회와 같이 신상을 세우고 그 앞에 절하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잘 알 것입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가 세운 가치들, 그 핵심에는 자기중심성이 있습니다. 나의 안락과 나의 만족을 추구하는 삶의 양식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장애물이 된다면 바로 그것이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상들은 우리를 더욱 목마르고 메마르게 할 뿐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의 질서를 결코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들은 무력한 구원자일 뿐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배반할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그러한 우상들을 거부하고 오직 하늘의 가치만을 좇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우상, 즉 자기중섬성에 머무를수록 게으름과 안주함 속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것이고, 반대로 우리가 참된 교회의 모습이 되려고 애쓸수록 종말론적 긴장을 경험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본질
그렇다면 교회가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 하는 종말론적 긴장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우리에게는 최후 승리와 영광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이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을 바라보고 꿈을 꿉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현실이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냉혹한 현실을 바라보면 어마어마한 사단의 제국이 버티고 있습니다. 로마는 망했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정사와 권세는 세력을 공고히 다지며 세상 모든 것을 주무르고 있지요. 교회는 그 권세에 비하면 초라하고 무기력하게 보일 따름입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세상이 시키는대로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권세를 향해 우리는 죽기까지 불복종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세력을 키워 세상을 정복해야 하는가? 정부 주요 요직에 크리스찬들을 앉히고 기독교 기업인들을 많이 배출해서 기독교 국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세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 세력과 싸워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그런 이상을 붙든다면 과거 이스라엘과 교회의 실패한 역사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방식은 거대한 세상에 굴복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희생과 불이익을 감수하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 교회의 종말론적 긴장입니다. 승리는 확실하다고 하지만 지금 현재는 손에 아무 것도 없는 초라한 상황,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서도 이 땅의 세력들에게 예속되어 있는 교회의 현실...... 매우 어색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교회에 주신 사명이자 운명입니다. 별도의 해결 솔루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자는 이러한 긴장이 해결해야 할 숙제가 아니라 교회가 존재하는 당연한 배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말론적 긴장 속에 있는 교회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을, 교회를 구별해 주는 것일까요? 우리는 신약성경이 교회에 대해 무엇이라 정의하는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요(야고보서 1:1) 하나님의 이스라엘이요(갈라디아서 6:16) 은혜로 택함받은 남은 자요(로마서 11:5) 제사장의 나라(요한계시록 5:10)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단어로 말한다면 '신앙'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특별하게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되게 한 것은 특별한 민족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민족성을 칭찬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심판의 근거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신명기 9:6, 개역개정)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에스겔 2:3, 개역개정)
이스라엘의 경제력이나 국력도 주변 국가에 비해 크게 월등했던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조건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순종으로 반응함으로써 하나님 백성됨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오직 그 신앙이 그들을 특별하게 했습니다. 현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만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그분의 통치를 드러내게 할 것입니다. 화려하고 잘 조직된 교회의 명부에 등록된 것이, 세련된 대학부, 청년부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됨을 나타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참 본질을 숙고한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러한 체계와 형식들을 너무나 쉽게 무시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고 들으며 실망을 금치 못했던 교회는 8장에서 언급한 바 있는 '가시적 교회' 즉, 예배당을 중심으로 한 눈에 보이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교회는 가시적 교회와 동일시 될 수 없습니다. 가시적 교회는 태생부터 사회 구조와 질서 안에 예속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가시적 교회는 항상 가이사의 지배 하에 놓여 있습니다. 반면 '비가시적 교회',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하나님의 참 남은자 된 진실한 백성들은 결코 깨어지지 않으며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이사의 제국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가시적 교회는 세상 권세에 굴복할 수 있지만 진실된 교회는 그 어떤 위협에도 항복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시적 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무교회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비가시적 교회가 가시적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행동할 수 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신실한 백성들도 이스라엘 국가라는 틀 안에서 회개를 부르짖으며 재건의 노력을 해오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가시적 교회 가운데는 알곡과 쭉정이가 섞여 있지만, 우리는 겸손하게 이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정하고 "교회를 교회다운 존재로" 세우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교회, 선교
그러나 참 교회를 세우는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저자는 교회가 능동적으로 행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선교인데, 교회는 선교적 소명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새로이 만들어진 사명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 곳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목적이 이방 민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임을 말씀하십니다. 이 메시지는 모세오경을 비롯한 구약 모든 곳에 심겨져 있지만 가장 노골적으로 요나서에 드러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압제하는 악랄한 앗수르, 그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선지자 요나에게 전달됩니다.
이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이만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다. 내가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 (요나 4:11, 공동번역)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는 택함받았다는 의미를 오해한 채 스스로의 안위에만 골몰하여 이 사명을 망각하고 실패에 이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종의 노래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빛을 전해야 한다고 예언했지만 그들은 그 운명을 거부했고 선교하는 백성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고난의 종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교회를 참된 이스라엘로 부르셨다는 것은 그들로 이방의 빛이 되는 역할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온 열정을 바쳐 헌신해야 할 것은 바로 선교, 즉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8장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에 침투하여 그 권세를 쫓아내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그 일을 하셨지만, 이제 그 일은 교회에 위임되었습니다. 선교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행위이며, 이것은 인간 영혼이 영생과 멸망 사이에서 좌우되는 투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선교는 결코 수동적일 수 없습니다. 교회는 적극적으로 이 복음을 붙들고 전진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초청해야 합니다. 복음을 향한 초청만이 사람들을 구속받은 백성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9-20, 개역개정)
우리는 구주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얼마나 진지한 태도를 갖고 있나요? 신약 교회가 종말론적 긴장의 운명 가운데 던져진다는 것은 바로 이 선교의 사명 속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겉으로는 가진 것이 없어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진실된 순종의 백성들인 교회와 함께 일하실 것이며, 우리를 통해 흑암에 있는 백성들에게 빛을 비추실 것입니다.
▷ 9. 세상 끝날까지(2) 에 이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