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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Jul 22. 2019

8. 두 세계 사이 : 하나님 나라와 교회(3)

하나님 나라, 백성, 교회

※ 표지그림 :  Raphael, 「The Miraculous Draught of Fishes」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행하신 기적은 하나님의 통치가 사단의 나라에 침투해 들어왔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 여기'에서 내세의 능력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해당됩니다). 죄의 지배력이 풀려나기 시작했고 사단의 통치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메시야 예수가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는 사실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중 하나가 그분의 백성들을 부르시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확보하지도, 정치적 입지를 다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나라는 지리적 경계가 아닌 백성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자,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이 땅에서 시작되었고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백성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순종, 복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이 순종에 대한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명령은 '긴급성'과 '근본적인 결단'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만 진지하게 곱씹는다면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마태복음 13:45-46, 개역개정)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참 좋은 곳'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더 높은 마음가짐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세속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다 누리면서 함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모든 소유와 생애를 걸고 이 나라를 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역으로 이러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그 나라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부르심 앞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약간의 도덕적 개선이나 새해 결심으로 따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가복음 14:26, 개역개정)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복음 5:29-30, 개역개정)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9:33, 개역개정)


 예수님의 과격한 말씀들이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지만, 그분께서 전달하고자 하시는 의도(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그 나라를 갈망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대해서는 본문의 말씀들을 결코 희석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은 어떤 측면에서 무섭습니다. 사실상 선택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순종하고 그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멸망의 운명 밖에 없습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편 2:12, 개역개정)


 저자는 단호히 주장합니다.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나라의 구성원들은 그의 통치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교리를 한 번이라도 공부했던 사람은 우리가 순종(행위)이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것은 옳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낡아빠진 의가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함으로만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순종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조건이 됩니다. 삶에서 드러나는 순종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증명해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더럽히는 이들로부터 갈라디아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예를 들며 아래와 같이 선언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갈라디아서 3:6-7, 개역개정)


 그러나 동시에 야고보 사도도 아브라함의 예를 듭니다. 그는 믿음을 립서비스 정도로만 여기는 이들에게 아래와 같이 준엄하게 경고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야고보서 2:21-22, 개역개정)


 두 사도는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강조점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그분을 구주로 신뢰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진실되다면 우리의 삶은 당연히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으로 바뀔 것입니다. 실수와 실패가 중간중간 있을 수 있지만 우리의 삶의 지향점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전과 다른 삶으로 움직여갈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발성과 욕구를 확인해주는 보증인 것이지요.


 아래 그림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전도를 위해 많이 활용되는 사영리의 내용입니다.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백성됨은 단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을 때 내 인생의 주인은 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한 후에는 반드시 삶에서 예수가 내 인생의 왕좌에 앉아계신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없는 것이지요.


사영리 내용 中


 복음서에서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나라의 구성원들은 그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윤리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며, 예수께서는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 뿐 아니라 모든 세대의 백성들에게 이러한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긴박한 메시지를 숙고해야 합니다. 그분의 메시지는 종말론적입니다. 즉 내일 세상의 끝이 올 수 있다는 가정이 늘 따라다닌다는 말입니다. '일단 믿는다고 말해 놓고' 삶의 결단은 미루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청에 '지금 여기서' 순종과 의를 보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


 이제 우리는 선지자들의 예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선민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했던 이스라엘은, 그들 스스로가 백성될 자격없음을 증명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씨'라는 혈통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맺은 백성의 국가는 죄악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허우적거리다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택함받은 백성의 징표인 할례도 그 자체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죄악이 거듭될수록 하나님께 충성된 남겨진 소수를 주목했고 그들에게 소망을 걸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남은 자' 사상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사야 10:20-21, 개역개정)


 또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에게 마음의 법을 주시고 그들 속에 순종의 마음을 심어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들은 국가나 민족이 아닌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이 개념은 신약성경에 이르러 완전히 구체화됩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31:33, 개역개정)   


 마음으로 유대인인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마음에 받는 할례가 진정한 의미의 할례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로마서 2:29, 쉬운성경)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로마서 11:5, 개역개정)


 자,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바로 교회 (Ekklesia, 부르심을 받은 자들) 입니다. 신약성경은 교회야말로 이스라엘 소망의 진정한 상속자요 영적 이스라엘임을 선언합니다. 교회는 참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이며 택하신 족속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내로 비유했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야고보서 1:1, 개역개정)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며 왕의 제사장입니다. 또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홀로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심을 선포하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전에는 은혜를 몰랐지만, 지금은 은혜를 받고 누리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9-10, 쉬운성경)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마치 신랑을 위해 단장한 신부의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 쉬운성경)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새로운 언약을 맺으셨다는 사실을 곳곳에서 진술합니다. 우리는 1장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로 인해 언약은 파기되고 맙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 나라의 실패가 될 수 없음을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고, 구주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와 새로운 언약식을 거행하셨습니다. 그 장소는 바로 조그만 다락방이었습니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린도전서 11:25, 개역개정)

  

「최후의 만찬」, Jacopo Tintoretto


 선지자들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고대하던 가장 큰 소망이 바로 이 만찬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열 두 제자들과 함께한 최후의 만찬은 바로 언약의 성찬이었습니다. 그 언약식에서는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열 두 지파와 언약을 맺으셨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열 두 제자의 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저자는 12라는 숫자의 상징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이후 가룟 유다의 배신과 죽음이 있은 후 제자들이 즉시 맛디야를 택하여 다시 숫자를 채웠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이 연합의 언약을 완성하시기 위해 스스로 고난의 종이 되어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셨던 새 언약을 통해 '마음의 법을 소유한 백성'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죽음에 참여하였다면, 그분과 연합하여 그분의 부활에도 참여할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죄의 몸이 무력하게 되었으므로, 우리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로마서 6:5-6, 쉬운성경)




미래의 승리가 약속된 교회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한 기적들은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사단이 다스리는 세상 속에 침투해 들어 왔음을 선언하는 신호였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그 권능은 절정에 다다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패배와 절망처럼 보였겠지만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결정적인 승리였고, 이로 인해 사단은 회복 불가능한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고난의 종의 사역은 성취되었고 존귀와 승리의 영광이 확보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 승리 뿐 아니라, 장차 도래할 미래의 완전한 승리까지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그 승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확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필연적인 승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권력과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고,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돌려드릴 마지막 때가 올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원수를 자기의 발 아래 두실 때까지 당연히 왕노릇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멸망받을 마지막 원수는 죽음입니다. (고린도전서 15:24-26, 쉬운성경) 


 우리는 조마조마하게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믿음은 최종적인 승리를 확신하는 신앙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기쁨과 위로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 믿음을 소유했고 지옥의 권세도 이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지을 것이니, 지옥의 문이 이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16:18, 쉬운성경)


 이 점에 대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로마서 8:31, 쉬운성경)




가시적 교회와 진정한 교회


 그러나 우리는 냉정한 현실 가운데서 약속된 승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로마 제국 아래에 있던 초대교회를 기억해 봅시다. 우리는 교회가 거대한 제국 앞에 그 어떤 힘도 쓰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승리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소수였고 연약했으며 미천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을 당시, 여러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의 표준으로 볼 때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권력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26, 쉬운성경)


로마의 카타콤


 초대교회는 겨자씨가 자라 거대한 나무가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달리 제국의 위용 앞에 움츠리고 숨어 지낼 뿐이었습니다. 음부의 권세도 이길 수 있는 것이 교회였지만, 그들은 가이사가 다스리는 로마를 이길 수도 없었습니다. 아니, 그들은 애초에 로마라는 나라를 바꿔볼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황제의 핍박 아래 성도들은 죽거나 고난을 당할 뿐이었지요. 그것이 초대교회의 현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 하나 앞에 마주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적인 규모나 세력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외적 규모로서의 교회'를 편의상 '가시적 교회'(눈에 보이는 교회)라고 부르겠습니다. 가시적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일까요? 신약성경은 가시적인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구약에서부터 훑어온 주제들을 기억하시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가나 체제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여겼을 때 선지자들은 그들의 마음가짐을 통렬히 비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교회 역시 교세나 양적 성장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외적 규모가 하나님 나라의 크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러한 유혹에 종종 빠집니다. 교회를 크게 짓고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특히 사회 고위층들을 전도해서 교회를 위해 일하게 하면 세상 누구도 우습게 볼 수 없는 영광을 얻는 것일까요? 그렇게 해서 불신자들을 굴복시키고 인정하게 만들면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눈에 보이는 건물, 조직, 구성원의 숫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가시적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국가가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었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마태복음 13:24~30). 오직 하나님만이 참 알곡이 누구인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승리, 우리가 바라볼 최후 승리는 어떻게 얻는 것일까요? 복음서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당신의 나라에서 저희에게 첫째, 둘째 자리 주시기를 원합니다."라는 무례한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이 의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 "너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리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마가복음 10:38, 쉬운성경)


 여기서 말씀하시는 잔과 세례는 예수께 곧 닥칠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참혹한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첫째, 둘째가 되는 것은 바로 이 고난의 종이 감당할 길을 따르는 것임을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정복적인 하나님 나라를 생각했고 그로 인해 얻을 존귀만을 바라보았지만 예수께서는 그 나라의 승리가 세속적인 방식으로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고난받는 종 예수를 따라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고 욕을 먹고 미움을 받고 고난을 당하는 삶만이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최후 승리의 그 날에 누릴 영광은 형언할 수 없이 존귀한 것이겠지만 이 땅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길은 교만하고 정복적인 세속적 방식이 아닌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고난의 길인 것이지요.  


「Domine Quo Vadis」, Annibale Carracci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신약의 교회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긴장 가운데 살아갑니다. 우리는 두 개념 모두를 안고 살아야 합니다. 확실하게 임한 하나님 나라를 믿고 살아야 하고, 완성될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확신하며 예수의 길을 따라야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위의 그림처럼 미래의 승리를 확신하는 신앙이 이러할 수 있을까요? 최후 승리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뒷짐 지고 그 나라의 완성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현재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 만족하지 않고 완성될 그 나라를 절박하게 고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남은 자들은 그 나라가 하루빨리 임하기를 기도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은 절제와 긴장의 삶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최종 승리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성도들이 치를 싸움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승리로 마귀의 권세는 박살이 났지만, 여전히 그들은 우는 사자와 같이 성도들을 위협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길 것이지만 가혹하고 치열한 싸움을 통과해야 합니다. 결정된 승리를 '이미 이긴 축구경기의 재방송을 보는 것이다'라고 비유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종말의 때에 성도들이 가져야 할 역동성이 배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김세윤 교수가 비유한, 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전투'가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서부전선의 독일 정예부대는 끝장이 났고 독일의 위세는 완전히 꺾였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이 최종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최후의 소탕전이 남아있는 것이지요. 이제 승리는 확실하지만 이 마지막 단계를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종말의 시대를 사는 교회는 바로 이 과정을 통과하며 최후 승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강력한 가이사 제국의 핍박과 순결함을 희석시키는 유혹... 교회는 이 도전들 앞에 늘 직면해 왔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하고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믿음에서 떠났습니다. 요한은 밧모 섬에서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탄식을 환상 가운데 보았습니다.


 이 영혼들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주님, 저희들을 죽인 자들을 어느 때에야 심판하시고 벌하실 것입니까?" (요한계시록 6:10, 쉬운성경)


 지난 장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초대교회와 같은 핍박이 없다고 해서 우리에게 태평한 시대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된 성도로서 눈을 뜬다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죄악의 유혹과 압력들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또한 수많은 나라에서 초대교회와 같은 핍박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험들을 정면으로 통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승리가 보장되었지만 마지막 전투는 치열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때에 분노를 터뜨리는 마귀가 어떻게 성도들을 학대하고 괴롭힐 것인지 묘사합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선택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교회는 여전히 불같은 시험 가운데 있고 "죽도록 충성하라"(요한계시록2:10)는 구주 예수의 격려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교회는 2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인내하라"는 말씀을 붙들고 싸우며 최후 승리를 애타게 기다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기도는 '마라나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참고 기다리십시오. 농부는 귀한 추수를 바라고 참고 기다립니다. 그는 또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곡식을 촉촉이 적셔 주기를 기다립니다. (야고보서 5:7, 쉬운성경)


"조금만 있으면 오시기로 한 그분이 오실 것이며, 결코 늦지 않으실 것이다. 나와 함께 의롭게 산 사람들은 믿음때문에 생명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믿음에서 뒤로 물러난 사람들을, 내가 기뻐하지 않겠다." (히브리서 10:37-38, 쉬운성경)



▷ 9. 세상 끝날까지(1) 에 이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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