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하는 교회
저자는 현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변함없는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being에 머무르지 않고 doing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 본질은 선교입니다.
이제 우리는 저자가 다루는 현대 교회의 이슈들과 사명을 살펴보려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실까요?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소망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일까요?
사실 시대가 변했다 해서 교회의 사명이 변할 수는 없습니다. 곧이어 살펴보겠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교회의 사명들은 매우 일반적이고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들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그 사명에 얼마나 가까이 가 있느냐이겠지요. 만약 저자가 논하는 내용이 우리에게 전혀 새롭게 들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본질과 멀어져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교회는, 이 땅을 다스리는 이가 세상의 정사나 권세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는 그것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것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해 온 것은 주로 '예배당 안'에서의 활동들이었습니다. 예배와 모임, 기도회에 참석하고 교사와 성가대로 섬기며 성경공부를 하거나 전도를 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소중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당 안에서의 활동에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의 진짜 본질적인 관심을 놓쳐버린 것은 아닐까요? 저자는 현대 교회의 실패가 여기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관심, 즉 하나님 나라의 '의'는 개인의 경건이나 절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과 사회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시고, 이를 위해 교회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그분의 의를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길거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입으로 외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학교, 직장,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불의와 모순과 같은 사단의 통치를 하나님의 통치로 바꾸는 것,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줄곧 개인적 윤리, 즉 술이나 담배, 주일성수, 바른 언행 등에 초점을 맞춘 '소극적 의'에만 집중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계시는 '심연의 불의'에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부도덕한 습관들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회의 깊고 넓은 곳들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만드는 그분의 요청을 거절해 왔습니다. 이러한 편협함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반드시 심판을 받게될 것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통치의 승리가 모든 곳에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너무 지나치다'거나, '예배보다 사회에 너무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을 왜곡하는 행위입니다.
▶ 교회는 그리스도의 하나된 몸이다
교회는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몸된 우리들이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될 때 드러납니다. 구주 예수께서는 이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동일한 제목으로 성부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5, 개역개정)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21, 개역개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파와 교단들을 보게 됩니다. 물론 복음의 본질 안에 견고하게 서 있기만 한다면 그리스도를 섬기는 관점과 방식의 다양성은 인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현실을 곱씹어볼 때 우리는 얼마나 '하나됨'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단 안에 또다른 분파들이 있고, 같은 교단 안의 교회들 사이에 알력과 경쟁이 있습니다. 심지어 한 교회 안에서도 파당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시기하고 수근거리며 싸웁니다. 이러한 나뉘어짐에 대한 정당성은 없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고린도전서 1:12-13, 개역개정)
혹자는 사도행전 15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를 전도여행에 데려가는 문제로 심히 다투고 갈라선 사례를 가지고 분열을 정당화하려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봅시다. 이 본문에 나온 바울과 바나바의 사건이, 우리가 서로 권장하고 본받아야 하는 내용일까요? 그들이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갈라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각각 인도하셨지만(이후 바나바의 행적은 나오지 않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에도 동일한 은혜를 주셨음을 믿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나뉨을 정당화시켜주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본문은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일을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가 분열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옛 이스라엘이 열 두 지파였으나 언약 하나님 법 아래 사랑으로 연합되었던 것처럼 신약의 교회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거대화와 분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현대 교회가 명심해야 할 진리입니다.
▶ 나가서 증거하라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증거하고 선포하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선교'라는 단어가 주는 선입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선교는 특별한 소명을 받은 누군가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선교는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이것이 '부탁'이 아닌 '명령'임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미련한 우리들을 사용하시어 그 나라를 이루어 가기를 원하시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교는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인데 너는 여기에 동참하겠느냐?" 라는 시험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통치 하에 살고 있을 때 에스더라는 유대 여인이 파격적으로 왕후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 때 하만이라는 권세있는 신하가 유대인들을 미워하여 왕에게 민족말살의 정책을 아뢰고 왕은 무심히 거기에 도장을 찍습니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에스더를 키워준 모르드개라는 사람이 에스더에게 사람을 보내어 왕에게 이 명령을 취소하도록 간언하기를 요청합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자신을 향한 왕의 총애가 많이 식어졌다고 느껴 자신없다는 답을 보냅니다(왕의 허락없이 그 앞에 나아갔다가는 즉결 사형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르드개의 비장한 경고성 답변이 다시 에스더에게 전해집니다.
... "지금 왕비께서 왕궁에 살고 계신다고 하여, 다른 유다인이 다 당할 일을 왕비께서만 피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왕비가 잠잠히 있다 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유다인은 해방과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비와 왕비의 집안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왕비가 지금 왕비의 자리에 오른 것도, 바로 이런 때를 위한 것인지 누가 압니까?" (에스더 4:13-14, 쉬운성경)
민족이 몰살당할 위기 앞에서도 모르드개는 단호한 신앙을 보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결코 망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구원하시리라! 그러나 이 구원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멸망을 당하리라. 너는 참여하겠느냐 도망가겠느냐? 선택하라."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도 요청되는 선교의 사명인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백성인지 역사를 통해 늘 시험받고 있다는 말이지요. 나는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내가 있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까? 필요하다면 내가 희생하고 수고하여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선교적 삶을 사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은 이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수치와 거절과 손가락질을 당하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내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충만하게 느끼게 된다."
구주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인간도 대신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이 땅에서 마음대로 살아도 좋은 '부적'이나 '천국 티켓'으로 인식한다면 크나큰 오류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고난의 종'의 사명을 성취하러 오셨습니다. 동시에 그분은 이 사명을 교회에 위임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예수가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똑같이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않다'고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다면, 너희도 핍박할 것이다. 그들이 내 교훈을 지켰다면, 너희의 교훈도 지킬 것이다 (요한복음 15:20, 쉬운성경)
교회는 이 사명 외에 다른 것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이것 뿐입니다. 예수께서 조롱과 배척과 침뱉음과 매맞음과 사형을 당하신 그 길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 앞에도 펼쳐져 있습니다. 자기중심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가려 하지 않는 좁은 길인 것이지요. 저자는 본서를 통해 수차례 이 메시지를 던져 왔습니다. 우리는 이 사명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확실한 것은 교회가 이 명령에 순종했을 때 위대해졌고, 이를 회피하려 했을 때 천박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고난의 종 사명을 무시했을 때는 몸뚱이만 비대해졌을 뿐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소명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소명은 십자가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지만- 쉽게 이 길을 갈 수 있다고 고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좁은 길을 걷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숙고해야 하고 우리가 치를 값지불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누가복음14:28-32). 이런 관점은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를 재조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십자가는 본래 사람들에게 '거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린도전서 1:23, 개역개정)
따라서 교회의 양적 팽장으로 말미암은 승리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인 사고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어떤 오류와 실패를 경험했는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충분히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나 교회 다닌다'는 표식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견고하고 드높은 우리의 자기중심성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머릿속에 만들어 놓은 승리의 방식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승리의 길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구주 예수께서도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는 십자가에서 참혹한 고난을 당하셨지만, 그 직전에 또다른 십자가를 통과하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싸움이었습니다.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방법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아닌 다른 방법이 있기를 간절히 구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분은 결국 이 싸움에서 이기셨고 자신의 생각을 성부께 복종시켰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태복음 26:39, 개역개정)
아버지의 원대로! 이 고백이 완성되었을 때 모든 것은 끝났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셔야 했지만, 사실상 승리가 확정된 순간은 이 때였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이기신 예수는 주저없이 고난의 종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불의와 값싼 의를 포기할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의가 우리 안에서 통치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아마 불같은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을 겪어야만 할 것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신앙의 백성이 되는 승리의 길입니다. 이를 하찮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눈에 아무리 보잘것 없이 보이는 결단과 내려놓음이라 해도, 자기중심성을 꺾어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은 세상을 이긴 신앙의 승리인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일서 1:4, 개역개정)
어떤 이는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교회가 결국 승리한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나요?"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 외에 아무런 근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대답은 많은 이들을 좁은 길 앞에서 돌이키게 만들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증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지요. 우리는 신앙으로 그것을 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이상하게 볼 수도, 가엾게 여길 수도, 적대하거나 조롱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다른 방법들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만나주신 하나님, 그분의 부르심에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사실 신앙에 객관적 증거라는 개념 자체가 맞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소망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로마서 8:24, 쉬운성경)
우리가 살펴보았던 예레미야 선지자를 기억해 봅시다. 그의 생애는 불행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비난과 위협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수없이 "어찌하여!"라는 질문을 던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많은 말씀을 주셨지만 그가 인간적으로 바랐던 명쾌한 답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놋 성벽'(예레미야 1:18)이 되어 말씀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명쾌한 답변이 없다고 해서 사명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맹신하며 아무런 질문없이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했고, 그 답변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생애를 맡겼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눈 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순들과 자욱하게 낀 안개와도 같은 불확실성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고대하며 순종의 전진을 하는 것이 영적 이스라엘의 삶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히브리서 11:8-11, 개역개정)
사실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습니다. 메시야를 고대하기만 한 채 끝내 눈으로 보지 못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났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말씀으로 들었으며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눈부신 승리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은 고난과 죽임을 당했습니다. 명백한 가능성이나 증거가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세상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이들이 바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브리서 12:1) 입니다.
...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히브리서 11:35-38, 개역개정)
참된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어둠을 헤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눈 앞에 보이는 시련과 고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는 가시적 교회 안에 든든히 서 있는 참된 교회를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명만 주어진 채 홀로 남겨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20)는 예수님의 약속대로, 교회와 동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경험하며 좁은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