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나의 세상은 이제 엄마아빠보다는 친구들에게 향했다. 부모님의 전쟁은 익숙해졌고, 웬만한 두 분의 다툼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그리고 우리 집의 전쟁은 전면전보다는 국지전 양상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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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새~ 우~우는~ 고오요~~한 강 언덕에~
그대와~ 두울이서~ 부우르는 사 라앙노래~
흘러가는 저~ 강~물 가는 곳이 그 어데뇨~
조각배에 사랑실고 행복 찾아 가 자요~
물새 우~우는~ 고오요~~ 한 강 언덕에~
그대와~ 두울이서~ 부우르는 사 라앙 노래~
잠을 깨우는 웅장한 돌비 서라운드 사운드.
익숙해진 트로트다.
웬만큼 가사까지 외워졌다.
이렇게 오래된 노랫말이 아직도 맴돌 정도다.
아빠다.
아빠의 평생 동반자 트로트다.
어느 날 저녁
여지없이 한 잔 걸치신 우리아빠.
집으로 들어오는 표정이 오늘은 좀 다르다.
무언가에 잔뜩 들뜨셨다. 기분이 좋다.
이유인즉슨 큰마음먹고 전축을 하나 사셨단다.
LP와 CDP가 세트로 다 있는
전축과 오디오의 중간 세대쯤 되는 커다란 세트였다.
처음 전축을 집에 들이는 날
아부지는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CD를 구해오셨다.
빠라 빠! 빠 빠바바. 빠라 빠 빠 빠바바.
빠라 빠! 빠 빠바바. 빠라 빠 빠 빠바바.
그날 온 가족은 잘못된 만남의
그 신나는 전주와 함께 방방 뛰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우리 집도 언제나 전쟁터는 아니었다.
그 날이후 우리집엔
한과 흥과 촌스러움이 한데 어우러진
웅장한 돌비 서라운드 사운드 음악이
자주 흘러나왔다.
아주 가끔이지만
두 분이 발맞춰 사교댄스 연습을 하시기도 했다.
약간은, 약간은 모서리가 덜 날카롭다.
아~ 이즈음 깨닫기 시작한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대한 장르, 트롯트...
이거 은근히 중독성이 크다.
내 방에서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아빠가 듣는 레퍼토리가 얼추 익숙하다.
배호, 박일남, 오기택...
중저음의 남자 가수들 노래를 자주 들으셨다.
그 당시엔 ‘누구누구 골든‘ 이런 앨범이 많았다.
어쩌다 아빠와 함께 차를 타고 장거리라도 가면
거의 강제 주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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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깨달았다.
나도 이것이 취향에 맞다.
나이 들어가면서 그런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였다.
물론 쇼미 더머니에서 '힙합은 안 멋지다.'라고
만천하에 내뱉은
천재 가수만큼 대범하진 못했다.
트로트도 웬만한 최신 유행곡이어야지.
내 나이보다 더 오래된 감성들.
나에게 켜켜이 쌓여온 정서가 그랬다.
어딘가 아리는 한이 있고, 멋쩍은 흥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촌스러움이... 아니
그 멋을 진심으로 느낄 줄 아는
깊~~~~은 마음이 있다.
플레이리스트에 적당히 티 안 나게
여러 장르를 섞으면 크게 문제는 없다.
오히려 유니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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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트로트는
그리움의 트리거가 되었다.
노래와 인생의 장면과 서사는 늘 하나로 붙어있다.
나에게 '돌아가는 삼각지'는
아빠의 생선 트럭을 타고
낚시를 가던 날이 붙어있고,
나에게 '고향 무정'은 새벽일을 나가시는
아빠의 두툼한 외투의 실루엣과 걸음걸이,
뒷모습이 붙어있다.
나에게 ‘비 내리는 고모령’은
술에 잔뜩 취해 고개를 떨구고 읊조리는
중저음의 아부지의 목소리에 붙어있다.
글 짓는 내내 트로트 한가락이
중저음으로 흥얼거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