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새로운 적응

1985

by 브로카

다음 날 눈을 뜨니 낯선 환경이다.

이전 집보다 더 좁고 낡아 보인다.

이사를 간 집은

미로 같은 골목의 중간쯤이다.

다닥다닥 붙은 블록벽


그나마 좋은 건 공용 수도꼭지 바로 앞이라

그건 좀 편했다.

이 골목길 속 수십여 가구는

이 수도꼭지 하나를 공동으로 사용한다.


물은 아침나절과 오후부터 저녁까지

하루에 두 번 나왔다.

수도꼭지를 여러 개로 분배해

순차적으로 각 집에 있는 수조에 물을 가득 채운다.

동네에 있는 많은 아이들이

시간맞춰 수도꼭지에 자기 집 호스를 꽂는

엄마가 내준 숙제를 처리하곤 했다.

그 수조 속 물로 밥도 짓고 세수도 하고....

앗 그리고 화장실은 골목 어귀에 공용화장실이다.


대문은 없다.

얇은 은색 알루미늄 새시에

꽃문양 패턴이 새겨진 반투명 유리.

그 미닫이 문이

우리 집 대문이자 현관문이다.

유리 미닫이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면

좌측에는 큰 수조가 있고, 수조를 지나 더 깊숙이 들어가면

연탄아궁이가 있는 주방이 있었다.

방 앞에는 4~50cm 정도 앞으로 돌출된 나즈막한 툇마루가 있었고

그 위엔 방 두 칸이 나란히 불어있다.


골목길 안은 동갑의 친구들이 몇 있었다.

숫기 없고 말없는 나는 선뜻 친해지자고

손 내밀지는 못했지만,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같은 학교 같은 학년 친구들이었다.


이 집에서 1학년은 보냈었던 것 같다.

이 집에서 첫 편, 딱지 에피소드도 있었고

툇마루에서 글씨 쓰기 숙제도 했다.


그 집에 살던 시절

울아빠 초보 트럭 생선장수는

트럭이 빗길에 미끄러져

할머니와 함께 사고가 났었던 기억이 있다.

아빠는 다리를 다쳤고, 그 후유증 때문인지

나중에 연세드신 이후엔

살짝 절룩거리기도 하셨다.

조각 조각 단편적 기억이 많이 남아있다.



내 유년시절에 한 가지 참 궁금했던 것이

우리 가족은 왜 객지로 갔다가 다시 왔을까....였다.

한번도 여쭤본적은 없었다.

철이 들면서...

어쩌면 당연한 해답들을 스스로 내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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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엄마아빠는

술폭군 어시장 지게꾼 시아버지와

시장에서 생선을 파셨던

드세디 드센 시어머니,

그리고 줄줄이 시동생 6명 부양하는

장남과 맏며느리였다.


어휴~~~~


딸 둘까지 낳았으니...

정말 그 늪에서 벗어나고 싶으셨을 테지...

엄마아빠는 딸 둘을 데리고 대구로 가셨다.

돈 벌어서 귀향하리라는 꿈을 꾸며

시월드를 떠나 도주하다시피 가버리셨겠지...


그래서 나는 대구에서 태어났다.

칠성사이다? 공장 옆에? 살 때 그랬더란다...


그림, 서예, 공예 등 손재주가 좋으신 울아빠는

대구에서 나전칠기를 시작하셨고,

울엄마는 꽃장사, 보험설계사, 포장마차 등

할 수 있는 이것저것 하신모양이다.

다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매우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이었나 보다.


늪을 탈출하고 싶어 큰 도시로 갔건만,

객지에 나가보니 또다른 진흙탕이었겠지....

그리고... 새끼가 셋이나 입을 벌리고 있으니

모르긴 몰라도...

그때의 우리엄마 우리아빠....

깊은 시름은 천길 낭떠러지였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렇게 견디고 견디던 시절을 전쟁같이 흘려보내고

차라리 고향으로...

부끄럽고 화도 나지만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어무이랑 고기장사나 해보자....


그래서 울아빠엄마는 십년 쯤의 타향살이를

청산하고 다시 귀향을 하신 모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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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무뚝뚝했던 할머니...

함께 살던 사촌동생들을 더 예뻐하시는 할머니.

울엄마에게도 나에게도 그다지 친절하진 않았다.

이래저래 곱게 보이지 않았을테지...


그나마도 큰아들네가 귀향한 그해 겨울

할머니는 떠나셨다.

이분들의 마음은

세월에 뭉게져 경계가 흐물어졌을까.....

시간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른이 된 나는

점점 그분들의 마음의 경계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모두가 각자의 마음으로
버티고, 도망치고, 다시 돌아고기도 하고
그 안에서 누군가는 미워지고
누군가는 말없이 견디고...

그 집도, 그 골목도, 그 어른들도
살아내느라 거칠어졌으리라...


그 거친 마음들 속에서

그 좁고 낡은 집에서
세상이 생각보다 참으로 복잡하다는 걸
아주 이르게 배운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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