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의 기시감,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에 대하여
AX는 이제 하나의 국가적 기조가 되었다. 정부의 업무 회의와 정책 발표를 보면, 효율과 실리는 핵심 가치로 반복해서 언급된다. 빠른 의사결정, 비용 대비 성과, 생산성 향상. 기술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제시된다.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AX의 개념은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다
하나는 시스템의 AI 전환(AI Tranfomation)이다. 업무 시스템을 자동화하고, 생산 인력을 줄이고, 비용 구조를 최적화하는 산업·조직 차원의 변화다. 다른 하나는 AI 경험(AI Experience)과 활용의 확산이다. 개인의 삶에서 체감되는 편리함, 접근성, 생산성 향상을 의미한다. 정책 담론에서 강조되는 ‘사회적 효용’은 주로 이 두 번째 의미에 가깝다. 그러나 실제로 집행되는 사업의 성격은 첫 번째에 더 가깝다. 이 두 개념이 구분되지 않은 채 하나의 AX라는 말로 묶이면서, 논의의 초점은 흐려진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미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장면을 경험했다. 쇠퇴하는 구도심에 새로운 활력을 만들겠다는 명분 아래 예산은 집행되었고 성과는 만들어졌다. 벽화와 조형물, 앵커 시설은 빠르게 들어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드러난 것은 운영의 유지와 실질적 효용성의 부재, 주민의 삶과 분리된 공간, 그리고 지역에 남겨진 관리 비용이었다. 도시는 변한 것처럼 보였지만,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AX에서도 비슷한 기시감이 자꾸 느껴진다.
국민들 삶의 질을 높이겠다는 기술일 텐데, 실제로 설계되는 것은 일부 관리자의 편의를 높이는 관리 시스템이다. ‘편리한 사회’를 말하지만, 집행과 평가는 ‘효율화된 구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도시재생이 공간을 살린다며 구조물을 남겼듯, AX는 인간을 돕는다 말하며 자동화만 남길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AX의 성과지표를 보면 이 방향은 더 분명해진다. 처리 속도, 비용 절감, 자동화율, 생산성. 이 지표들은 시스템의 성공을 설명하는 데는 유효하지만, 우리의 삶은 구체적으로 설계하지 않는다. 고용의 질, 역할의 안정성, 개인이 감당해야 할 전환의 비용은 대부분 지표 바깥에 있다. 그래서 사회에는 묘한 간극이 생긴다. 인공지능 시스템은 잘 돌아가겠지만, 개인은 자신의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느낄 것이다.
콜센터 자동화는 이 이중성을 잘 보여준다. 인공지능은 분명히 노동자에게 부과되던 과도한 감정 노동과 정신적 소모를 줄여준다. 이는 기술이 해결할 수 있는 실제 문제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직무 자체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문제는 자동화의 정당성 여부가 아니라, '그다음 단계가 준비되어 있었는가'다. 대체되는 노동은 어디로 이동하는가, 그 이동의 비용은 누가 감당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아직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 공백은 결국 인간 사이의 갈등으로 대두될 것이다. 먼저 전환에 적응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AI를 활용해 성과를 내는 쪽과 평가 대상이 되는 쪽, 기술의 혜택을 설명하는 쪽과 그 비용을 감당하는 쪽 사이의 간극이다. 이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위치의 문제다. AX는 사회 구성원들을 같은 속도로 이동시키지 않는다.
여기에 정부의 대대적인 사업 구조의 허상은 반복되어 보인다.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와 기대감을 준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단기간에 가장 확실한 혜택을 받는 주체는 대개 사업을 실행하는 업자다. 이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사업은 집행을 요구하고, 성과를 요구하며, 그 성과를 만들어내는 주체는 외주화 된 실행 조직이다. 반면 정책이 약속한 사회적 효용의 수혜자는 추상적이고, 운영과 삶의 문제는 사업 이후로 밀려난다.
도시재생에서 그랬듯, AX 역시 일회성 사업으로 끝날 위험을 안고 있다. 시스템은 남겠지만, 계약은 종료되며, 적응의 부담은 개인에게 남는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전진의 방향과 속도가 누구를 기준으로 설정되었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GPU 26만 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외교적 성과에 대한 무용론이 아니라, 그 전환의 무게가 누군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 고통이 될 것이라는 우려의 대책에 대한 질문이다. 효율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IT 기술을 모르고, 이공계 출신이 아니며, 지금까지 사회를 작동시켜 온 다수의 사람들은 이 전환 속에서 어떤 자리를 갖는가.
AX는 단순한 기술 정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정부 부처의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면, 기술 개발 용역과 연구 용역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고 있다.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연구는 넘쳐나지만, 그 변화가 일의 의미와 역할의 가치, 그리고 삶의 안정성을 어떻게 재배치하는지에 대한 연구 용역은 찾아보기 어렵다.
AX는 기술 도입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전환이다.
기술 개발과 함께, 그 전환이 만들어낼 비용과 충격을 검토하는 연구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의외로 해법은 복잡하지 않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AX 관련 입찰과 사업에는, 부정적 영향과 사회적 비용을 평가하는 연구가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현재의 논의는 여전히 기술과 효율의 언어에 치우쳐 있다.
성과는 수치로 설명되지만, 전환의 비용은 충분히 말해지지 않는다. 자동화 이후 밀려나는 역할, 적응하지 못한 개인의 위치, 사회가 감당해야 할 불안은 논의의 바깥에 남아 있다. 논의되지 않은 선택은 언제나 묵살된다. 지금은 아직 질문을 던지고, 방향을 수정할 수 있는 시점이다. AX를 단순한 기술 사업으로 축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환의 결과를 함께 사유하는 연구와 논의가 이제는 정책의 중심으로 들어와야 한다.
AX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전환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누구를 어디로 밀어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가속되는 AX는, 언젠가 도시재생과 같은 질문을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놓쳤는가. 왜 삶은 비어 있었는가.
전환 이후의 삶을 고민하려는 사회적 사고는 간과해서는 안될 필수적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