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
초여름 장마가 한참이던 어느 날이었다.
이른 저녁 어김없이 울그락불그락 잔뜩 술에 취해 귀가한 우리아빠
무언가에 또 몹시 화가 나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화살이 엄마를 향해있진 않았다.
그 시절 나에게 있어 부모님은 가장 불안한 존재들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들
언제 어떻게 불똥이 튈지
노심초사 비위를 맞춰줘야 할 불안한 존재들
잔뜩 신경을 곤두세워 아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위기를 파악한다.
엄마와 오가는 거친 대화를 조합해 보니
일터에서 함께 일하던 작은아빠와
사소한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다.
작은아빠의 일처리가 못마땅했던 아빠가
뭔가 서운한 말을 던졌고,
그에 맞서 작은아빠도 불편한 표현을 했던 모양이다.
한참을 오가던 거친 대화가 잦아들고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지만
우리 집 저녁 분위기는 다소 잠잠해지는 듯했다.
아빠의 분노도 나의 곤두선 신경도 잠시 소강상태를 맞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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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나의 큰 착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엔 폭풍우가 들이닥쳤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작은아빠가 우리 집으로 쳐들어왔다.
작은아빠도 이미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었다.
두 어른은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힘겨루기와 함께
서로에 대한 억울함을 소리치며 몸부림쳤다.
두 어른의 몸싸움에
급기야 미닫이 현관의 유리창은 와장창 깨어졌고,
초여름 장마의 폭우는 그대로 집안으로 들이쳤다.
깨어진 유리에 상처 입은 두 어른은
물기와 피에 미끄러워진 바닥에서 뒤엉켜 뒹굴었다.
휘청거리는 몸싸움과 말도 되지 않는 괴성을 한참 주고받던 중
작은아빠를 뒤따라 달려온 작은엄마가
온몸으로 작은아빠를 떼어내고 집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후로도 우리아빠는 혼자서
엄마를 향해, 나를 향해
그리고 자리를 뜨고 없는 작은아빠를 향해
허공에 대고 괴성을 지르며
대단한 억울함과 분노를 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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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그칠 줄 모르던 아빠의 난동은
이제 갓 소년이 되어가는 순둥이 아들의
폭발한 울분과 온몸을 쓴 완력으로 제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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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있다.
형제간에 일하다 보면 서로 서운한 일 생길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다툴 수 있고,
마음이 상해 술도 한 잔 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취할 수도 있겠지.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다.
모든 상황은 그럴 수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갓 중학생이 된 내가 겪은 그 사건은
매우 공포스럽고 겪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누군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가령...
밖에서 사람들 만나서 술 한 잔 마실 수 있고,
술은 마셨지만 잠깐만 가면 되니 운전할 수 있고,
운전하다 보면 사람을 칠 수도 있고,
차에 치였으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
거짓말처럼 비는 멈추었고
한마디 말없이 엉망이 된 집안을 치우는 우리엄마
역시 아무 말 못 하며 그 뒤를 따라다니는 아들
이후 그 사건에 대해 말한 적은 없다.
아빠도 엄마도 나도 그날을 말하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그럴 수 있는 사건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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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그러지 않으려고 의식한다.
누구처럼 될까 봐 평생 술을 배우지 않았다.
부모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대를 이어 그럴 수 있음을
아이들에게 강요할까 봐
의식하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