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이여, 영화는 그대들을 겨냥하지 않았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다 보면 문제가 생기는 지점이 있다. 과욕.
영화가 많은 주제와 이야기를 담고 있을수록, 그리고 그 영화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을수록 글이 너무 길어진다. 감독 이야기도 하고, 영화와 주제를 공유하는 다른 영화의 이야기도 하고, 장면의 디테일에 대해서도 짚어보고 명대사, 명장면까지 다루다 보면 글이 난잡해진다. 그래서 글을 쓸 때는 공을 들여서 쓴 문장이나 꼭 언급하고 싶었던 문제점이라도 과감하게 쳐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리니까. 하긴, 나 자신도 그걸 그렇게 잘 해내는 편은 못 된다.
82년생 김지영은 다루기가 매우 조심스러운 영화다. ‘반드시 사람들이 봐야 할 영화’라고 극찬을 하는 이들도 있고 ‘여자들의 망상을 담은 판타지’라고 혹평하는 이들도 있다. 어중간하게, 소신껏 영화에 대해 리뷰를 올리면 아무래도 어느 쪽의 공감도 받지 못할 테다. 하지만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해보기로 했다.
개별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영화에 나온 모든 에피소드는 여성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인간적으로 대우하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아내와 남편의 동등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시댁, 막내아들에게 편향된 혜택,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 듯한 성폭행/성추행에 대한 공포, 여성의 유리 천장과 직장 내 성차별, ‘몰카’에 대한 불안, 육아의 고독함. 이 문제들은 모두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어봤을 만한, ‘남 일 같지 않은’ 사회의 구조적 폭력이다.
문제는 이것이 소설이 아닌 영화라는 점이다. 2시간의 러닝타임에 이 모든 에피소드를 삽입하려다 보니 각 내용에 충분히 공을 들일 수 없다. 뭉툭한 대사 사이로 사회적 불합리가 쉴 틈 없이 내달린다. 이렇게 내달리면 그것을 실제로 겪어왔던 여성들에게는 쉽게 공감을 얻을 수 있지만 직접 경험한 바 없는 남성들에게는 당황스럽다. 개별 사건의 배경을 탄탄하게 구성하여 힘 있게 설득하는 대신 관객의 공감 능력과 이해력을 테스트한다. 말하자면, ‘너 이거 알지? 여성들은 실제로 겪는 문제들이야’ 같은.
영화의 초반은 그렇게 휘청였다. 감독은 핵심적인 키워드를 덜어내어 적절히 분배하는 방법을 택하는 대신 각각의 스토리의 이음새를 최선을 다해 매만졌다. 아니, 원작을 생각해보면 상당 부분 줄어들긴 했다. 아마 더 줄이면 원작의 색깔 자체가 희미해질 수도 있겠다는 판단일지도 모른다.
불합리를 숨 가쁘게 토해내는 초반부를 지나 김지영 씨의 현재를 짚는 부분에 들어서는 순간 안정이 찾아온다. 김지영 씨, 정대현 씨, 그리고 엄마의 감정을 비교적 길어진 숏으로 담아내며 숨을 고른다. 처음부터 에피소드를 탄탄하게 쌓아 올렸다면 이 영화의 평가는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영화는 ‘자신이 아는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남편, 대현을 통해 문제가 단순히 개별 ‘한국 남성들’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구조적 폭력과 패러다임에 있음을 명확히 한다. 대현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면서 영화는 한층 더 효과적으로 문제를 조명할 수 있었다. 다정한 남편이지만 여전히 육아는 '도와주는' 개념이라는 것, 육아를 하는 것을 두고 '조금 더 쉬라'는 표현을 한 것, 지영을 힘들게 하는 엄마에게 강한 의사표현을 하는 대신 좋게 좋게 넘어가려고 한 것, 빨래를 개는 지영의 맞은편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것. 지영의 친정에서 지영이 자신의 집에서 한 만큼 살뜰하게 지영을 챙겨주지 못한 것. 대현은 노력하는 좋은 남편이지만 여전히 깊은 곳에 남아있는 가부장의 잔재를 치워버리진 못했다.
촬영과 색감은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디테일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국문학 전공 지영 씨가 사는 집에 책이라고는 가지런히 꽂힌 ’세계문학전집’ 뿐이다. ‘여직원이 커피를 타서’ 회의실로 가는 모습은 요즘 시대상에 비추어 볼 때 어색하다. (물론, 이것 또한 내가 겪지 못했을 뿐이지 어딘가에는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 남학생이 버스에서 내려 지영이 공포를 느끼는 모습은 눈짓 몇 번으로 표현되었고, 몰카는 렌즈뿐만 아니라 송수신기, 배터리 등 상당한 공간과 주기적 관리까지 필요한데 비현실적으로 표현하여 공포를 키웠다. 딸이 성폭행의 위협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을 때 ‘피하지 못하는 네가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아빠는 혈육이라기보다는 남처럼 느껴진다.
더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모두가 한 번쯤은 볼만 한’ 영화로 만들어준다. 보면서 공감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보는 이의 잘못이 아니다. 원래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현실 이외에는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눈치채기 어려운 법이니까. 영화의 에피소드들은 (물론 눈에 보이게 표현하기 위해 과장된 부분은 있지만) 여성이 실제 느끼는, 혹은 느껴 본 적 있는 현실이다. ‘내 주위에 저런 사례를 본 적 없으니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은 명백한 논리적 오류이다.
현실성을 따지며 ‘요즘 저런 것들을 모두 겪으며 사는 사람이 어디 있냐, 있어도 극소수다’라고 지적하는 것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고 있는 꼴이다. ‘요즘엔 저런 거 없다’라고 하지만 대한민국 인구는 오천만이고, 개인이 알고 있는 100명 안팎의 삶 이외에도 사회의 사각은 존재한다. 소수라고 해도 존재한다면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그리고 사실 소수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화살을 돌릴 만한 사안도 아니다. 사회적 구조 안에서 많은 것들은 당연하게 여겨져 왔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사고의 한계를 규정지어왔다. 바꿔야 하는 것은 개인을 세뇌한 시스템이고, 인구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남성을 설득하지 못한 변화는 무의미하다. 전쟁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남성은 줄곧 사회를 주도해 왔고 수천 년간 고착된 관념의 변화는 순식간에 이루어지지 않기에 고정관념의 단단한 껍데기를 계속해서 두드려야 한다. 고달픈 과정이다. 혁명으로 확 뒤집어 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식은 그런 식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흑인 노예 해방 이후 150년,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50년이 지났지만 인종 차별은 아직도 남아있지 않나.
영화를 성역화할 필요도, 무조건 비난할 필요도 없다. 이 영화를 보자고 말하는 여자 친구를 ‘손절’ 해야 한다는 말에는 헛웃음만 나온다. 오히려 나는 ‘이 영화에 경기를 일으키는 남자 친구’를 손절하라 하겠다. 자신의 취향에 꼭 맞지 않더라도 영화 한 편 같이 보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게 페미니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더욱 위험하다. 이 영화를 보자고 말을 꺼내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이라면, 일찌감치 손절하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