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사유’마저 공격하는 존재에 대한 질문
데카르트는 일찍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말했다. 내가 만약 통속에 담긴 뇌로 존재하고, 여기에 전기 자극을 주어 오감을 속일 수 있다면 우리는 실존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맛보는 것, 맡는 것 모두 가짜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뇌만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사유’하고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에 사유는 실재한다. 데카르트는 생각을 불변하는 존재의 증명으로 보았다.
‘매트릭스’의 감독, 워쇼스키 자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는 바로 이 데카르트가 남겨 놓은 존재의 마지막 성역, ‘사유’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뇌과학이 보잘 것 없었던 데카르트의 시대에는 사유야 말로 존재의 증명 이었지만, 뇌의 작동방식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지금은 생각에 대해 두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첫째는, 인간의 사유는 실재하지 않으며 단지 ‘뇌’가 수행하는 전산의 총합이라는 견해, 바로 데이비드 흄의 '번들 이론'이다. 최근 과학자들은 예쁜 꼬마선충의 모든 뉴런과 시냅스를 분석하여 그대로 디지털로 구현해냈고, 컴퓨터 속의 예쁜 꼬마선충은 어떠한 프로그래밍도 없이 ‘살아’ 움직였다. 고통을 가하면 몸부림치고, 장애물을 만나면 피해가고. 물론 사람에 비하면 너무 보잘 것 없는 존재이지만 0과 1로도 생명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과학이 좀 더 발전해서, 인간의 뇌를 고스란히 컴퓨터에 이식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나를 복제한 그 ‘전뇌’는 나와 똑같이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할수 있다. 그렇다면 나와 저 컴퓨터 안의 존재는 동일인물인가? 현실의 내가 죽어도 저 안에서 계속 살아가게 되는것인가? 아니면 생각은 할 수 있지만 별개의 존재인가? 아니, 저게 애초에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번들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저것'이나 '나'나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은 허상이다.
둘째는, 의식은 연산의 결과물이 아니라 존재하는 실체(영화에서 말하는 고스트)라는 관점, '진주 이론'이다. 과학적으로 현재까지 우리가 알고있는 정보를 종합하면 번들 이론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뇌에 대해 아는 것은 너무 적다. 미시 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을 뇌과학과 접목하면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를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
데카르트로서는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하면 고로 존재해야 하는데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 연산이라니? 데카르트의 주장은 '진주 이론'으로 기울 수 밖에 없다.
공각기동대의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은 전신이 전뇌, 의체화가 된 사이보그다. 생명의 흔적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고스트’가 있다고 믿는다. 공각기동대의 세계에서는 ‘고스트’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가 인형과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에 이 고스트의 존재는 (자신이 고스트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하다. 하지만 그녀는 ‘인형사’ 사건을 겪으며 고스트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인형사라는 해커를 쫒던 중 쿠사나기는 두 사람을 체포하게 된다. 한 사람은 테러리스트, 한 사람은 쓰레기를 수거하는 청소부다. 체포 하고 심문하다 보니, 테러리스트는 처음부터 고스트가 없었던 ‘인형’, 그리고 청소부는 기억을 조작당한 인간이다.
인형과 인간. 그 사이에서 쿠사나기의 의문이 시작된다. 그녀는 지금까지 고스트가 존재하지 않는 인형을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소부는 어떤가? 청소부는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 존재지만 기억을 조작당했다. 고스트는 존재하지만 기억이 조작된 청소부는 이전과 같은 청소부라고 말할 수 있는가? 기억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까지 지배할 수 있는데?
공안 9과에 붙잡힌 인형사는 쿠사나기 소령의 전뇌와 의체가 제작된 ‘메가테크’사에서 갑자기 조립된 의체이다. 한번도 인간이었던 적 없고, ‘진짜 뇌는 한조각도 없는’ 이 인형을 조사하던 중 고스트와 비슷한 어떤 것을 발견한 쿠사나기 소령은 자신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그 의체에 접속(다이브)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니까, 쿠사나기 소령의 질문은 이렇다.
“전뇌 자체가 고스트를 낳고 혼을 깃들이는 거라면 그땐 뭘 근거로 나임을 믿어야 할까?”
인형사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다. 6과의 부장은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불과한’ 인형사는 생명체가 아니라고 폄하하지만 인형사는 ‘그것은 인간의 DNA도 마찬가지 아닌가’라 하며 생명은 정보의 흐름속에서 나타난 결절(혹)같은 것이라 반박한다. 자신 또한 정보의 바다(네트워크) 떠돌다가 생겨난 결절이니 생명체로 불릴 수 있다고.
인간은 끊임없이 실존을 원한다. 아내와 딸이 모두 허구의 존재라는 말을 듣고 푹 꺾어진 청소부의 고개는 왠지 측은하게 느껴진다. 그걸 깨닫지 못했다면 차라리 행복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실존에 대한 것은 알면 실망스러울 뿐이니 굳이 캐내지 말고 행복하게 사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쿠사나기 소령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끝까지 질주하고, 감독은 쿠사나기 소령의 입을 빌어 한숨같은 깨달음을 내어놓는다.
"애초에 나라는 존재는 없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주변 상황을 통해 나라는 게 있다고 판단할 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이 말은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나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와 어딘가 닮아 있다.
"모든 것이 고정된 변하지 않는 그러한 실체가 없듯이, '나'라는 존재 또한 무수한 인과 연들에 의한 작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색(물질)은 공(없다)이고 공(없다)는 색(물질)이다."
불교 철학이 소름끼치게 놀라운 것은 이 가르침이 최신 물리학 이론인 '양자역학'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이중 슬릿 실험에서 밝혀진 것처럼 물체는 관찰되기 전까지 (다른 물질과 상호작용을 하기 전까지) 물질이 아닌 파동으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공을 색으로 돌려놓는 것은 인연(상호작용)이라는 것.
사고실험과 철학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공각기동대는 너무나 즐거운 영화다. 고스트와 실존에 대한 해답은 오시이 마모루 감독 자신도 찾아내지 못한 것 같지만 (그래서 보여주지도 못했지만) 원래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상영이 끝난 후 시작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