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이 직업인 배우와 진심을 연주하는 뮤지션의 엇갈린 운명
김종관 감독의 영화, <최악의 하루>를 보면서 그의 언어에 감탄했던 적이 있다. 영화 속 은희(한예리 분)는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에게 우리는 비슷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둘 다 거짓말을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역시 글을 쓰던 사람이 영화를 만들면 대사의 퀄리티가 매우 달라진다는 것을 느낀다)
소설을 쓰거나, 연기를 하는 것. 현실을 꾸며내는 그들의 직업은 진실될 수 없다. 진실밖에 쓸 수 없는 소설가와 진실밖에 말할 수 없는 배우는 수필가와 다큐멘터리 출연진이 돼버릴 게다. 그들은 꾸며내야 하고, 진실이 아닌 거짓을 대중에게 팔아야만 한다. 그게 그들의 역할이고.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는 어떤가. 상품으로써 판매되고 소비되는 ‘아이돌’이 아닌 자신이 어떤 예술을 만들어낸다 믿는 아티스트는 모두 진실을 통해 인정받기를 원한다. (물론 극소수의 아이돌은, 자신이 Authenticity를 갖춘 아티스트임을 증명하기도 한다.) 그들은 모두 내면의 무언가, 진짜를 꺼내야 한다. 그래서 배우와 음악가는 둘 다, 예술을 하지만 그 방향성은 전혀 다르다.
영화 <라라랜드>의 결말은, 아마 이 두 부류의 사람이 만났다는 것에서 이미 예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아는 끊임없이 위를 본다. 카페에 온 할리우드 배우를 동경의 눈으로 보고, 오디션을 망치고 온 날에도 혹시 나타날 백마 탄 왕자를 위해 파티에 나선다. 그녀는 어쩌면 배우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스타가 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배우와 스타는 다른 건데. 오히려 미아를 스타가 아닌 배우의 길로 이끄는 건 세바스찬이다.
미아의 차는 항상 가야 할 때 멈춰있거나, 견인당해 버렸거나,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차는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한 수단이다. 미아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과연 하고 있는 걸까? 미아는 배우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실제로 영화에선 미아가 열정을 태워 노력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오디션에 떨어진 굴욕만을 반복해서 보여줄 뿐. (반면 세바스찬의 연습 장면은 반복해서 나온다)
심지어 미아의 차는 프리우스다. 경제적인 하이브리드 차량, 그야말로 특색이란 없는 현실의 끝판왕. 반면 세바스찬의 차는 낡은 구식이지만 빨간 오픈카다. 세바스찬의 차는 항상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다. 미아는 꿈을 꾸며 살지만 현실에 뿌리내리고, 세바스찬은 꿈을 향해 질주하지만 낭만에 기댄다.
세바스찬은 꿈을 간직하고 살아왔지만, 더 이상 꿈을 추구하긴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에게는 이제 사랑이 있었고, 사랑 앞에서 돈이 없는 그의 마음은 무겁다. 그때, 미아와 부모님의 통화를 듣게 되는 세바스찬.
그래서 세바스찬은 영화에서 가장 큰 실수, 희생을 선택한다. 사랑하는 사이에, 상대방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은 좋은 일 아니던가? 희생 자체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나, 우리는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에 제 멋대로 희생해놓고 제 멋대로 피해의식을 가진다는 게 문제다.
상대방을 위한 희생임을 스스로가 인식하며 선택하는 것은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 최악의 수다. 인간이란 참 간사해서, 주는 것은 끝까지 기억하고 더 크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택이 희생이 아니라고, 그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겠다 스스로 맹세할 수 있으면 모를까, 비장한 마음으로 선택한 희생은 반드시 화를 부른다. ‘내가 백수일 때가 좋았나 봐, 우월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같은 심한 말을 하는 세바스찬처럼.
둘의 다툼이 있기 전, City of stars의 이중창에서 불안함은 벌써 세바스찬의 표정에 나타나 있었다. 미아는 결국 사람들이 찾는 것은 사랑이라고 노래하지만, 세바스찬은 복잡한 얼굴로 미아에게 맞춰주다가 ‘이 감정이 계속 머물러 줬으면 좋겠어’라고 불안하게 끝맺는다.
라라랜드의 행복한 순간은 아주 짧은 콜라주로만 보여지지만, 이 행복하지 않은 동화는 너무 매혹적이다. 당시 겨우 두 편의 영화만 내놓은 신인감독, 데이미언 셔젤은 <위플래시>의 성공이 절대 우연이 아님을 증명했다.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여줄 진 모르겠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셔젤은 우리 시대에 가장 주목해야 할 거장 중 하나라는 것.
극단적인 롱테이크를 통해 관객은 뮤지컬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닌, 실제 뮤지컬 무대를 종횡무진 내달린다. 단 한곡도 버릴 수 없는 완벽한 넘버링 또한 라라랜드가 ‘신계’의 영화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다.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의 노래가 소름 돋는 가창력이었다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게 오히려 진실된 목소리로 들리는 것이, 감독의 역량을 증명하는 듯 하다.
이번, 감독의 신작 <퍼스트맨> 또한 훌륭한 영화였지만 개인적 바람으로, 셔젤 감독이 음악영화를 더 만들어줬으면 한다. 아마 <비긴 어게인> <원스>의 존 카니 감독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훌륭한 음악 영화감독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위플래시>의 전율과 <라라랜드> 의 몽환은 정말 그만큼이나 좋았다. 그의 영화가 나오면, 주저하지 않고 예매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