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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Dec 16. 2019

[비포 선셋]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그렇지 않다면, 사랑의 기회조차 떠나버릴 테니까


9년의 시간을 넘어 제시가 셀린느를 만나는 장면은 현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몽환적이다. 링클레이터 감독의 연출은 영화를 보고 있던 우리를 제시로 만들고, 온전히 그 상황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9년의 해후, 그들은 9년전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음에 탄식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만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솔직히, 카메라 연출이 큰 역할을 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이 연출만큼은 정말 감탄했다. 플래시백 사이에 끼어든 셀린느를 보며 관객들 또한 '내가 헛것을 보았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아무튼 그들은 오래 전에 끊어졌던 대화를 다시 이어나간다. 10년 전의 결정들에 대해, 현재의 삶에 대해, 그들의 엇갈린 운명에 대해, 변화에 대해, 욕구에 대해, 변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죽음에 대해, 섹스에 대해, 결혼과 이혼에 대해.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는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정답다.



9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가장 완벽한 연출이었다.  출처: 비포 선셋


제시 역을 맡은 에단 호크는 주름이 조금 늘었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비포 선라이즈의 그 미청년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다. 알콜 중독에라도 빠져서 폭삭 늙어버린 모습이다. (실제로 그는 당시 배우자였던 우마 서먼과 내연관계였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반면 셀린느(줄리 델피)는, 그 발랄한 귀여움이 조금 줄어들고 자신의 불만을 더 강력하게 표현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조금 더 '까다로워졌다'






서른이 된 그들은 조금 더 시니컬해졌다. 그 증거로 제시는 자신의 소설에서 ‘그들이 다시 만나는 버전’의 결말을 썼다. 그 내용인즉슨, 6개월 후 제시와 셀린느는 약속을 지켜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10일동안 쉬지않고 사랑을 나누다가 결국,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헤어지게 되었다는 내용. 그 결말은 출판사에서 거절하여 결국 더 ‘로맨틱’한 버전이 출간되었지만 제시는 굳이 그 사실을 셀린느에게 말한다.


그래그래 니들은 이성적일 수 있어서 좋겠다.  출처: 비포 선셋



셀린느는 ‘우리는 이렇게 잠깐씩 만나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몰라’ 라고 말한다. 사랑을 이루어지지 않는 그대로 두고, 그저 추억하며 아름다운 기억만 가지고 사는 것.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들이 옳다. 우리는 헤어져야 할 순간에 미련을 가지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인연을 이어가다, 결국엔 서로를 미워하게 되어야만 헤어진다. 그런 것 보다는 차라리 가장 좋은 순간에 헤어지는 것이 옳지 않을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출처: 비포 선셋


하지만 제시도 셀린느도 결코 이런 결말을 바란 적 없다. 그때 만났더라면, 결국 서로를 미워하게 되었더라도 아쉬움 없이 마음껏 사랑해 봤을텐데. 입버릇처럼 '우리도 결국은 헤어지게 되었을거야' 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특별했고, 그들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지난 9년이 너무 괴로워진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행복을 미뤄놨던 것일까. 그래서 저 사랑이라는 포도는 분명히 신 포도일 것이라며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제시의 말은 실망보다는 깨달음 처럼 들린다.  출처: 비포 선셋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하던 그들이 이제는 ‘영원한 거, 그게 뭐가 중요해? 현실에 충실해야지’ 라고 말하고, 오늘 밤 죽는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 서로에게 묻는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못해 표현하면서도 조심스럽다. 제시는 아이도 있는 유부남이고, 셀린느는 타인의 삶에 끼어드는 것을 옳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으니까.


이제는 놓치지 않겠다는 제시의 결심이 보인다. 심지어 감정적이고 신경질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폭발을 보이는 셀린느에게 보이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다정하다. 그는 아마 알고 있었을 거다. 눈치 챘을 거다. 셀린느와 함께 하기로 마음먹는다면 그 짜증과 히스테리와 폭발은 온전히 자신이 견뎌야 하는 것이 될 거라고. 그런데 제시는 그것을 보고도 돌아서지 않는다. 진짜, 사랑이다.


계단을 올라가는 두 사람은 뭘 기대하는지, 말 한마디도 꺼내지 않는다.  출처: 비포 선셋


<블루 발렌타인>의 딘(라이언 고슬링)은 신디(미셸 윌리엄스)에게, 좋을때나 나쁠때나, 자신의 최악의 순간에도 함께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그런데, 신디에게는 딘의 최악의 모습이 (결혼할 때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 모습을 보았다면 신디도 딘과 결혼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시는 셀린느에게 예측 불가능한 감정 폭발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사랑한다. 셀린느도, 제시의 무례한 모습에 실망했지만 사랑은 여전하다. 말 그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거다.


우리는, 우리의 최악의 모습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출처: 블루 발렌타인


셀린느는 자신이 과거에 받았던 상처들 때문에 제시에게 다가가는 것을 거부한다. 그 날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섹스는 기억나지 않는 척 꾸며 낸다. 제시의 책을 읽고 자신의 삶이 송두리채 흔들리고 있는데 거짓 태연한 척 한다.


제시는 천천히, 꾸준하게,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셀린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고 몇번이고 제시를 밀어내려 하던 셀린느 또한 자신의 마음을 살짝 보여주기로 한다. 고작 한시간 반동안의 이 밀당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잠시 현실을 내려놓고 그들의 동화속으로 다시한번 기꺼이 빨려 들어가고 싶어진다. 영화가 막을 내린 후, 그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현실은 그들을 어떻게 막아설까. 그들은 결국 행복에 다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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