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과 집착을 '사랑의 표현법 중 하나'라고 해도 괜찮을까
누구나 한 번쯤, 그런 경험 있을 것이다. 분명 나는 잘못한 것 없고, 떳떳하게 살아온 사람인데 누군가 내 휴대폰을 만지면 철렁, 하는 것. 예전에는 개인 정보들이 노트로, 다이어리로, 컴퓨터와 전화기로 파편화되었는데, 이제는 휴대폰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망할 놈의 동기화 때문에 구글 검색 목록도 내 폰에서 확인이 된다). 내 친구 차에 탔는데 여자 친구의 블루투스가 자동으로 연결됐다거나, 대형 프로젝터에 연결된 노트북 검색창에 p만 쳤는데 보라색으로 진하게 표시된 성인사이트 목록이 떴다는 건 이미 한물 간 농담이다. 친구들끼리 시답지 않은 농을 하는 단톡방에서도 대화 내용을 쭉 훑어보면 싸움의 단초가 나올 수 있지 않은가. (내 손가락은 내가 조절할 수 있지만, 톡방의 그놈들 손가락은 내 관할이 아니다.)
<완벽한 타인>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공포영화다. <서치>에서는 죽기라도 했으니 수치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내 연인이 휴대폰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보라. 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내게 잘못한 것이 없고 불륜 비슷한 것도 없더라도, 휴대폰을 공개하는 것은 그렇게 현명한 생각이 아니다.
이들에게서 한 꺼풀 벗겨내면 무엇이 나올지, 예진(김지수)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문명화되지 않은 사회의 나체. 공적인 삶을 사는 인간은 모두 예의와 교양을 챙기지만 사적인 삶에서는 민낯이 공개된다. 하지만 예진은 집 안에 공범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안전하다. (자신만 빼고) 모두가 안전할 수 없는 그런 게임을 제안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엿'을 먹는 건 준모(이서진)이다. 분명히 노렸다.)
제한된 재료를 가지고 영화를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류의 영화에서는 배우의 힘이 매우 중요해진다. 이 영화에 앞서 비슷한 시도를 했던 작품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대학살의 신>인데, 로만 폴란스키 감독 또한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를 통해 주목받은 명배우 크리스토퍼 발츠, 케이트 윈슬렛과 조디 포스터, <주먹왕 랄프>의 존 C 라일리를 캐스팅해 사운드를 꽉꽉 채운다. 초반의 루즈함만 조금 넘기면 흡입력이 굉장한 작품이니, <완벽한 타인>류의 영화가 좋았다면 <대학살의 신>도 한 번쯤 감상해 볼 만하겠다. 장르는 조금 다르지만 <맨 프럼 어스>도.
<대학살의 신>이 교양을 벗겨낸 인간의 가식에 집중했다면, <완벽한 타인>은 그 가식의 필요성을 (인셉션을 통해) 다시 쌓아 올린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매일 아침 직장에 출근해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것도 그 사람이 정말 안녕하신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아니 안녕 못하고 좋은 아침도 아냐. 완전 엉망인데 그딴 인사는 왜 해?’라고 쏘아붙이는 대신 ‘안녕하세요~’라고 화답한다. 그건, 사실 가식이 아니라 오해하기 쉬운 우리 인간들을 위한 최소한의 완충장치인 것이다.
연인 사이에, 부부 사이에 거짓말을 하는 것은 대체로 옳지 않다. 하지만 만약, 아주 만약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오해를 만들 소지가 있는 상황에 대해서 상대방이 모르는 게 낫겠다 라는 판단을 할 경우 거짓말이 필요해지기도 하지 않은가? 날것의 진실을 모르는 모두는 행복하고 그 가식을 적절히 해명할 기회도 얻게 된다. 수현(염정아)은 ‘재수 없는 건 아니고~ 그냥 뭐 지는 하는 얘기겠지만 난 좀 속상하지’라며 예진을 진심으로 미워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줄 기회를 얻었고, 태수(유해진)는 ‘별이’ 사진을 내려놓고 수현에게 돌아간다.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용납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석호(조진웅)는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어요. 우린 상처 받기 쉽고,
근데 이 휴대폰은 너무 많은 걸 가지고 있거든.
이 완벽한 기계로 게임을 한다. 이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사람들이 내가 아는 것보다 낯설 수가 있거든.
라는 말을 남기고 보란 듯이 예진의 앞에 휴대폰을 내려놓고 간다. 정말 바람직한 관계다. 나는 숨길 것이 없고, 하지만 상대방이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를 굳이 샅샅이 찾아보지 않아도 믿어주고. 하지만 진실을 숨기는 모두가 긍정적인 결말을 맞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한 감독은, 준모 하나만큼은 끝까지 남겨놓는다. 예진은 석호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준모에게서 관심을 거둘 것 같지만 준모는…? 아무리 조심해도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준모의 아내, 세경(송하윤) 또한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닌 듯 하니, 세경이 모른 척을 계속해 준다면 둘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중생활을 오래 하면 언젠간 잡힐 수밖에. 끝까지 믿어주려 해도 100%의 증거가 눈앞에 내밀어졌을 때는 아마, 세경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불장난을 하고 있다면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빨리 그만두는 게 좋을... 걸?)
영화는 온전한 관계, 건강한 관계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반복해서 던진다. 사실 영화가 제시하는 해답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상대방이 나와 분리된, 독립된 인격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없고, 모든 감정을 공유할 수 없으며 상대방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된다.
김지수와 딸의 갈등도, 유해진과 염정아의 갈등도, 이서진과 송하윤의 갈등도 상대방을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김지수는 자식을 자신의 종속된 존재로 보았고 유해진은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 상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서진은 ‘내로남불’,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특히 유해진은 '시어머니 모시기' 문제와 나한테만 무심한 남편, 명령조로 술도 못마시게 하는 등 가부장의 전형을 보여준다)
결혼과 삶, 관계에 대해서 너무 훌륭한 메시지를 제시한 이 영화는, 배우의 힘뿐만 아니라 감독의 역량 또한 충분히 보여준다. 감독은 틈틈이 숨겨둔 짧은 눈짓과 제스처로 복선을 훌륭하게 깔아 두었고 배우들의 치고받는 대화는 감독의 편집으로 한껏 더 조여진다. 마치 관객이 그 테이블에, 배우들과 함께 앉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구도나 한 장면에 담은 배우들의 다양한 표정으로 다채로운 감정을 전하는 장면 등은 그야말로 ‘배우 자체가 가진 힘을 최대한 뽑아먹은’ 연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영화를 함께 관람하고 나오는 커플은 무슨 생각을 할까? 서로의 삶을 존중하자는 생각을 할까? 아니, 그보다는 상대방의 휴대폰 안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일 거다. 그리고 자신의 비밀이 터져 나올까 두려운 이들은 영화 속 이서진처럼 버럭 화를 낼지도 모른다. 이런 더럽고 추잡한 영화 같으니라고.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것은 각자가 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솔직히, 이 영화의 메시지에 대한 혹평을 날리는 것은 너무 영화를 단면적으로 분석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는 한다. 후반부에 들어 아쉬운 장면이 한두 개 나오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연기, 각본, 촬영, 연출 모두 부족함이 없다 생각한다.
혹시라도, 이 영화를 놓쳤다면 반드시 한번쯤은 감상해 보시길.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라. 아마 이 영화는 그 사람의 선명한 캐릭터를 드러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