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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Dec 02. 2019

[아가씨]가 페미니즘 영화가 아닌 것 같다면

영화 제목이 '숙희'도 아니고 '후지와라'도 아니고 '아가씨'인 이유






박찬욱 감독의 시각은 항상 섬세하다. 많은 감독들이 표면적인 감정, 누구나 같은 상황에 처하면 느낄 보편적인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박찬욱 감독의 시선은 캐릭터의 실존적 질문을 파고든다. 특히 아가씨는, <올드보이>만큼 번뜩이는 천재성도, <친절한 금자씨> 만큼 강력한 카타르시스도 없었지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밍밍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영화가 담은 사회적 의미는 오히려 감독의 전작들보다 훨씬 깊어졌다.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 때부터 가지고 있던 여성 서사에 대한 호기심을 <아가씨>에 이르러서 페미니즘 적으로 표현해냈다. 마지막 장면에 전라의 베드신을 너무 ‘아름답게만’ 포장하여 또 다른 낭독회로 전락해버렸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글쎄, 모두가 보는 눈은 다른 법이니까.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상상하는 건 저마다 다르지 않나’라고, 극 중 코우즈키(조진웅)도 말하지 않았던가.


감독도 이 장면은 빼는게 어떻겠나, 라는 제안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출처: 아가씨



영화에는 페미니즘 영화에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전형이 나타난다.

여성을 도구화하고 억압하며 하나의 인격체로 상정하지 않는 남성(억압의 주체, 사회 구조의 전형),

자신을 매혹한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무지함으로 여성을 다시 객체화하는 남성(일반 남성),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으로 인해 격발 된 분노로 해방을 주도하는 여성(페미니스트),

그에 이끌려 억압을 벗어내고 자유를 찾는 여성(깨달은 여성)까지.


여기에 여성이면서도 억압을 주도하는 여성(사사키 부인)과 해방을 시도하다 죽임을 당한 히데코의 이모까지 더하면, 이 영화가 겨냥하는 곳이 정확하게 여성해방임은 굉장히 선명해 보인다. 이런 캐릭터의 구성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도 똑같이 나타났었다. 굳이 모든 캐릭터에 비중을 이렇게 줄 필요는 없지만, 사회상을 축소시키다 보면 이런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 것 아닐까.


페미니스트 리더와 팔로워, 지배자와 피지배 남성은 페미니즘 영화의 단골 구도다. 출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곳곳이 숨겨놓은 감독의 상징들은 또 어떤가. 은구슬(방울)은 중의적인 의미로 쓰인다. 은구슬은 코우즈키가 히데코를 훈육할 때 쓰는 물건이다. 소리를 지를 수 없게 입에 물게 하고, 어린 히데코의 손을 구슬로 세차게 내려친다. 그리고 그 흉터를 장갑으로 가리게 한다. 구슬은 폭력의 상징, 장갑은 마치 이슬람 여성의 히잡처럼 억압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이다. 너는 집에 종속된 ‘물건’이니, 타인에게 그것을 드러내서는 안 되고 타인이 간섭할 구실을 만들어서도 안된다고.



진짜 때린거 아닌거 알면서도 조은형 배우가 너무 서럽게 울어서 가슴아팠다.  출처: 아가씨



숙희는 집에 들어올 때 가짜 이름, 옥주를 번역한 타마코(玉子)로 소개가 된다. 이 이름을 지은 것은 후지와라 백작이고, 후지와라 백작은 히데코에게 숙희에 대한 무의식적인 적개를 심어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후지와라 백작의 의도와는 다르게 구슬은 폭력의 상징에서 쾌락과 사랑의 상징이 되어가니, 만약 이 이름까지 박찬욱 감독이 의도하고 상징으로 넣은 것이라면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디테일한 변태라고 할 수 있겠다. (‘봉테일’ 봉준호 감독도 세심하기로 유명하지만, 단언컨대 박찬욱 감독의 변태력은 그 이상이다!)


이 영화는 페미니즘에 대한 영화임과 동시에, 로맨스 영화로서도 상당히 인상 깊은 영화이다. 김민희 x 김태리 커플의 파격적인 베드신은 둘째 치고서라도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들의 대화가 심상치 않다. 히데코에게 ‘목욕의 즐거움을 알려주려고’ 사탕을 물려줬던 숙희는 그녀에게 키스를 가르쳐 줄 때도 사탕을 꺼내어 문다. (쓴가 하면 새콤하고, 신가 하면 달디달고, 단가 하면 고소하고) 자신의 사랑을 한껏 담아 키스를 건네는 숙희에게 히데코는 묻는다. ‘그분도 이렇게 부드럽게 해 주실까?’ 아니. 후지와라는 그럴 리 없다. 그는 섹스를 야동(낭독회)에서 배웠고, 그에게 여성은 어디까지나 객체일 뿐이니까.


숙희가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키스가 아니라 사랑일지도.  출처: 아가씨


대한민국의 성생활 만족도가 낮은 이유도 이것에서 시작한다고 본다. 문제는 테크닉이나 사이즈가 아니라 (대다수의) 남자는 섹스에서 끝까지 여성을 대상화한다는 점이다. 여성을 성욕 해소의 도구로 보는 사람이라면 사정하고 돌아누워 담배나 뻑뻑 필 것이고, ‘여성을 만족시키려’ 남성 잡지의 섹스 칼럼을 읽으며 테크닉을 연구하는 남자는 그나마 양반이긴 하지만 그 시선에서 여성은 여전히, 하나의 만족시켜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러니 남성들이여 제발, 모르는 게 있으면 시미켄에게 묻지 말고 당신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게 답을 찾으시라. 당신과 함께 즐기는 그 사람은 만족시켜야 할 대상도, 성욕 해소의 도구도 아닌 능동적으로 섹스를 같이 즐기는 인격체다. 이 생각의 전환이 선제되지 않은 테크닉의 발전은 (물론 어느 정도, 즐겁긴 하겠지만) 섹스의 궁극적 의미를 생각해 보았을 때, 결국 무의미하다.


여자는 강제로 당하면서 극상의 쾌락을 느끼잖아요, 이 대사가 실생활에선 절대 없을거라 믿는가?  출처: 아가씨


숙희는 젠체하지만 사실은 순진한 어린 아이다. 똑똑하고 영악한 척했지만 사랑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녀는 ‘쿵쾅거리면서 제가 화났다는 걸 표시 내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한숨 쉰’다. 그러면서도 히데코를 가엾게 여긴다. 히데코의 옥문을 정성스럽게 애무하다가 축축하게 젖은 얼굴로 올려다보는 얼굴이란 참, 그래, 저것도 사랑의 한 모습이겠거니 생각이 든다.


하지만 숙희는 또 대담하고 주도적이다. 후지와라 백작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녀는 스스로 움직이고 판단하며, 겁 없이 코우즈키의 빨간 책방을 털고 찢고 물에 빨아버린다(..) 주저하는 히데코를 이끌고 바탕화면으로 도망치며, 정신병원에 갇혀서도 능숙하게 빠져나온다. 그녀는 얽매인 것이 없으니 과감하게 그렇게 움직일 수 있다. 아마 숙희의 '페미니스트 적' 행보에는 이견을 표할 이 없을 것이다.


물은 '복수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불보다 멋진 도구다. 그냥 세트가 아까워서 그랬을 수도 있고.  출처: 아가씨


히데코는 영화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아 수동적인 인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사실 그녀 역시 능동적인 인물이다. 그녀 또한 해방을 누구보다 열렬히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구슬로 훈육을 받았고, 이모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도망치다가 걸려 지하실로 끌려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어떤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탈출하지 않았다고 페미니즘에 어울리지 않는 수동적인 인물이라 비난할 수 있을까? 그녀는 오히려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조력자를 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녀가 조력자를 구하는 방법은 바로, 그녀가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 낭독회다.



이미 후지와라 백작은 히데코에게 걸려들었다.  출처: 아가씨



이모는 낭독회에서 매우 소극적이었지만 히데코는 그렇지 않다. 낭독회는 히데코에게 주어진 유일한 무기니까. 자신의 카리스마로, 마치 배우처럼 무대를 장악한다. 자신의 낭독회를 음탕한 시선으로 능욕하려는 ‘신사들’을 도리어 유혹하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는 듯한 오만한 시선으로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채찍을 내리친다. 강제된 낭독회 속에서 조차 그녀는 당당하고, 그녀에게 굴복한 남성들은 ‘그녀를 10분 동안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내놓을 준비가 된다. 그렇게 꼬여낸 후지와라에게 조차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며 결혼이 아닌 거래를 성사시키고 자신이 안전하게 빠져나가기 위해 하녀를 데려오라 지시한다. 순진한 아가씨가 후지와라가 나타나자마자 그런 상세한 계획을 쏟아냈다고? 천만에.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히데코는 사실 모든 시나리오를 통제하는 영화의 여왕님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아가씨'인 것.  출처: 아가씨



숙희와 히데코는 그래서 닮아 있다. 서로가 서로를, 정신병원에 버리기 위해 선택했다. 다만 숙희는 히데코가 이렇게 ‘염병하게 예쁜’ 줄 몰랐고, 히데코는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하지 않는 첫 사람이 숙희가 될 줄 몰랐을 뿐.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두 여성이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 만났다가 연정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는,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해석해보면 꽤 상징적이다.


부족함이 없는, 행복하기만 해서 제 불행을 좀 나눠줘도 될 것 같았던 히데코는 알고 보니 남성의 욕망으로 덧씌워진 불쌍한 인간일 뿐. 그래서 여성은 연대를 시작하고, 결국 가부장제로의 편입을 상징하는 반지, 억압의 상징인 장갑, 그리고 남성성을 의미했던 콧수염까지 모두 한데 모아 바다로 던져버린다. 마침내 해방된 두 사람은 방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폭력의 상징인 구슬을 에로티시즘의 상징으로 바꾸어놓는다. 곧, 문은 닫히고 영화의 막이 내린다.


결혼 하지마?  출처: 아가씨



영화를 ‘페미니즘 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물론, 내가 페미니스트를 자처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된 페미니스트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온전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할 지라도 페미니즘 적 관점을 활용할 수는 있는 것이니까.


여성을 말하는 영화들이 앞으로도 많이 나와 주었으면 한다. 아, 그리고 너무 여성영화라고 소리 지르지 않았으면 한다. 페미니즘에 막연한 반감을 가진 이들도 즐겁게 관람하고, 이런 생각도 있군 하면서 끄덕이게 되었으면 한다. 여성영화라고 소리 지르면 결국 ‘그 메시지가 전달될 필요가 없는 이들만’ 영화를 보고 정작 변화가 필요한 곳에서는 외면당할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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