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끊임없이 조잘대는 연인만큼 사랑스러운 것도 없다
사랑을 믿는다는 건 왠지 유치하다. 특히, 그게 하룻밤에 이뤄진 사랑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주변 사람들이 뭐라 말할지 뻔하지 않은가. 니들이 고딩이냐? 금사빠도 정도가 있지. 하룻밤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야. 그건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지른 불장난일 뿐. 그렇기에 제시와 셀린느는 강력한 끌림을 느꼈으면서도 사랑이라 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다.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대신, 그 말하지 못한 감정들을 눈빛과, 주저하는 몸짓과, 아닌 체하는 말투로 끊임없이 고백한다. 물론 둘 사이가 완벽하지는 않다. 셀린느에게 ‘요즘 불만이 뭐냐’고 묻는 질문에 남자와 전쟁과 미디어 파시즘을 말하는 셀린느를 보며 제시의 표정은 당황한 눈치가 보인다. 어 이거 잘못 걸린 거 아냐? 하고. 페미니즘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불편해서 주제를 피하기도 한다.
호불호가 확실한 셀린느 쪽은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 제시라는 눈치 없는 남자는, 굉장히 마음에 들긴 하지만 나와 맞지 않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 특히 점쟁이한테 보여준 그런 무례한 태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옳지 않다. 현실적이고 냉철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이 남자의 마음속에는 질투가 가득하다. 멋진 시를 써준 거리의 시인에게도 의심을 품을 정도니.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제시와 셀린느라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관객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설득시킨 방법은 바로 대화다. 우리는 제시와 셀린느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의 집안 환경에서 자랐으며, 학벌은 어떻고 나이는 몇 살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감독이 보여준 적 없으니까. 그들의 대화는 사실에 대해서 밝히는 대신 생각에 대해서, 거의 쓸모없을 지경의 긴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그 관련 없어 보이던 짧은 대화들이 조금씩 쌓이며 셀린느와 제시를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겨우 하룻밤 사이 관객은 이들 캐릭터의 겉과 속을 샅샅이 확인했다.
주변에 솔로인 친구들을 잡고 물어보시라. ‘어떤 이성을 만나고 싶어?’라고 물을 때 70% 정도는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을 찾을 거고, 20% 정도는 외적인 이상형 조건을 말할 거고, 10% 정도는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거다. (물론 돈이 최고야! 를 외치는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만) 그렇게 대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탄성을 내지른다. 저렇게 끝없이 대화로만 즐거울 수 있다면 정말 완벽할 거라고.
대화가 잘 통하는 이유가 지식이 많다거나 두 사람이 완벽하게 포개어져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상대방과 내가 다른 사람임을 계속해서 확인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이야기도, 들지 않는 이야기도 모두 주의 깊게 듣고 있다. 자신이 말한 것으로 상대방이 나를 판단하지 않을 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첫 질문으로 ‘처음으로 느껴본 성욕의 대상’ 따위를 물어보거나 노숙자를 우롱하고 도망친, 좋지 않은 얘기들은 꺼내지 못했을 거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는 대범하게 요구하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 속마음이 있을 때는 상황극을 빌려올 줄도 안다. 자신 나름의 세계관이나 철학 등을 틈틈이 끼워 넣어 ‘내가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을 조심스럽게 알려준다. 그들의 세계관은 도덕적으로 완벽하지도, 모범적이지도 않지만 악의가 없고 따뜻하다. 용인해 줄 만하다. 이런 두 사람이 90분의 러닝타임을 그들의 대화로 가득 채운다.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작법은 보통의 로맨스 영화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로맨스라고 하더라도 Protagonist (주인공)가 있으면 Antagonist (대적자)가 존재해야 한다. 보통은 새로운 인연, 신체적/사회적인 한계, 생각의 충돌, 오해 등으로 대적자를 만들어 내는데 이 영화의 대적자는 시간뿐이다. 물론, 시간을 대적자로 내세운 영화들은 <블루 밸런타인>이나 <라이크 크레이지> 등 많은 영화가 있지만 이들 영화에서는 너무 긴 시간이 권태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주는데, <비포 선라이즈>는 이들을 사랑을 믿지 않는 젊은이들로 설정해 권태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시간에 쓰러지는 사랑이 아니라 시간에 쫓기는 사랑이라니.
현실이 끼어들 틈 없이 헤어짐을 선언한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영화로 남게 되었다. 물론, 우리는 속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인연이 하룻밤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알지만 1995년 당시에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9년 동안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을까. 드라마가 일주일만 끊겨도 초조함으로 기다리는데,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나오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전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비포 시리즈>와 함께 성장해온 분들이 참, 이번만큼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