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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Nov 18. 2019

[봄날은 간다] 라면과 김치 사이

그들은 왜 그렇게도 라면을 찾았나




‘라면 먹을래요?’


오늘 같이 있어요, 라는 말 조차 어려운 은수가 겨우 꺼낸 말은 라면 먹자는 말이었다. 식사보다는 가볍고 커피보다는 무거운, 겨우 5분이면 준비될 사랑. 그 사랑을 감독은 ‘라면’이라 표현했다.


첫 ‘라면’ 이후에도 이들은 계속해서 라면을 찾는다. 그러다 ‘김치’가 등장한다. 김치는 라면보다 훨씬 더 어렵다. 물만 끓이면 그만인 라면이지만 김치를 담그려면 알아야 할게 많다.


김치를 핑계로 은수를 가족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던 상우는, ‘김치를 담글 줄 모른다.’는 은수의 말에 ‘내가 담가줄게’라고 말한다. 갈수록 깊어지는, 낭만적 연애, 그 후의 사랑을 감독은 ‘김치’라 표현했다.


생각해보면, 은수가 삐뚤어지기 시작한 것은 '김치' 얘기를 꺼내면서부터다.  출처: 봄날은 간다


은수도, 김치가 맛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은수는 꺼져가는 감정을 다시 잡으려고 상우의 몸을 더듬어본다. 하지만 죄책감에 눈물이 나서, 상우에게 괜한 짜증을 낸다. 영원히 함께하자는 약속, 지켜진 적 보다 지켜지지 않은 적이 더 많은 그 맹세. 상우는 이제 끝이 보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마음을 다잡아 보려 했지만 흐르는 건 눈물뿐.  출처: 봄날은 간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모든 걸 다 바쳐서 사랑했던 그 여자, 은수는 그렇게 상우를 떠났다. 상우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라고 했지만 사랑은 원래 변하는 거니까. 은수는 이제 '오늘 같이 있을까?'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해졌지만 그녀가 할머니에게 선물한 화분은 이미 갈 곳이 없다.


3연벙 당하면 그게 짐승이지 사람이니?  출처: 봄날은 간다


<500일의 썸머> <봄날은 간다> <건축학 개론> 세 영화는, 많은 관객들에게 첫사랑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며 호평을 받았다. 재미있게도 이 세 영화는 모두 '어렸을 적 본 영화랑 많이 다른 느낌이다'라는 평을 받는다. 사랑은 하나고,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그때에는 흔들리는 썸머와 은수와 서연이 사람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나쁜 년들처럼 보였지만 이제 적당히 흔들림을 겪은 후에는 썸머가 왜 톰을 받아줄 수 없었는지, 은수가 왜 울음을 터뜨렸는지, 서연이 왜 그렇게 애매하게 행동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건축학 개론> 서연의 죄는 예쁘고 순수한 죄 밖에 없다.  출처: 건축학 개론


셋의 캐릭터를 비교해 보자면 단연 제일 나쁜 것은 은수다. 서연은 그냥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흔들렸고, 썸머는 다 알지만 자기가 감정을 느끼는 만큼 처음부터 적당한 선을 그어왔다. 은수는 빠졌다가, 밀어냈다가, 다시 원할 때 찾아와서 안았다가, 다시 떠나간다.


아무리 그래도 뒤통수를 세 번 치는 것은 좀 룰에 어긋나지 않나?  출처: 봄날은 간다


그럴 수 있다. 사람은 원래 흔들리는 동물이니까. 하지만 이미 한번 결혼을 경험해 본 그녀가,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고통을 아는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지. 연애를 드라마에서 배웠는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뭐든 해도 괜찮다고 믿는다. 이십대 초반이라면 풋풋함이었을 그 행동들은 이제 변명할 수 없다. 은수는 이기적인 나쁜 년이 맞다. 끝까지.


은수에 대한 유일한 변명은, 상우가 좀 더 능숙한 남자였으면 은수를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은수는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같이 묻힐까?' 라며 결혼을 암시하는 말을 꺼냈었고, 상우를 사랑했기 때문에 음악평론가에게 흔들림을 느끼곤 곧장 돌아와서 상우를 안는다.


재빨리 재깍재깍 대답을 했어야지. 김치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출처: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가장 좋은 날이다. 그 날은 지나고 난 후에만 그 아름다움이, 그 소중함이 보인다. 은수처럼 마음이 흔들린다면, 잘 생각해보자. 어쩌면 지금 당신 곁에 그 사람이, 당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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