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그렇게도 라면을 찾았나
오늘 같이 있어요, 라는 말 조차 어려운 은수가 겨우 꺼낸 말은 라면 먹자는 말이었다. 식사보다는 가볍고 커피보다는 무거운, 겨우 5분이면 준비될 사랑. 그 사랑을 감독은 ‘라면’이라 표현했다.
첫 ‘라면’ 이후에도 이들은 계속해서 라면을 찾는다. 그러다 ‘김치’가 등장한다. 김치는 라면보다 훨씬 더 어렵다. 물만 끓이면 그만인 라면이지만 김치를 담그려면 알아야 할게 많다.
김치를 핑계로 은수를 가족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던 상우는, ‘김치를 담글 줄 모른다.’는 은수의 말에 ‘내가 담가줄게’라고 말한다. 갈수록 깊어지는, 낭만적 연애, 그 후의 사랑을 감독은 ‘김치’라 표현했다.
은수도, 김치가 맛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은수는 꺼져가는 감정을 다시 잡으려고 상우의 몸을 더듬어본다. 하지만 죄책감에 눈물이 나서, 상우에게 괜한 짜증을 낸다. 영원히 함께하자는 약속, 지켜진 적 보다 지켜지지 않은 적이 더 많은 그 맹세. 상우는 이제 끝이 보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모든 걸 다 바쳐서 사랑했던 그 여자, 은수는 그렇게 상우를 떠났다. 상우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라고 했지만 사랑은 원래 변하는 거니까. 은수는 이제 '오늘 같이 있을까?'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해졌지만 그녀가 할머니에게 선물한 화분은 이미 갈 곳이 없다.
<500일의 썸머> <봄날은 간다> <건축학 개론> 세 영화는, 많은 관객들에게 첫사랑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며 호평을 받았다. 재미있게도 이 세 영화는 모두 '어렸을 적 본 영화랑 많이 다른 느낌이다'라는 평을 받는다. 사랑은 하나고,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그때에는 흔들리는 썸머와 은수와 서연이 사람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나쁜 년들처럼 보였지만 이제 적당히 흔들림을 겪은 후에는 썸머가 왜 톰을 받아줄 수 없었는지, 은수가 왜 울음을 터뜨렸는지, 서연이 왜 그렇게 애매하게 행동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셋의 캐릭터를 비교해 보자면 단연 제일 나쁜 것은 은수다. 서연은 그냥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흔들렸고, 썸머는 다 알지만 자기가 감정을 느끼는 만큼 처음부터 적당한 선을 그어왔다. 은수는 빠졌다가, 밀어냈다가, 다시 원할 때 찾아와서 안았다가, 다시 떠나간다.
그럴 수 있다. 사람은 원래 흔들리는 동물이니까. 하지만 이미 한번 결혼을 경험해 본 그녀가,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고통을 아는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지. 연애를 드라마에서 배웠는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뭐든 해도 괜찮다고 믿는다. 이십대 초반이라면 풋풋함이었을 그 행동들은 이제 변명할 수 없다. 은수는 이기적인 나쁜 년이 맞다. 끝까지.
은수에 대한 유일한 변명은, 상우가 좀 더 능숙한 남자였으면 은수를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은수는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같이 묻힐까?' 라며 결혼을 암시하는 말을 꺼냈었고, 상우를 사랑했기 때문에 음악평론가에게 흔들림을 느끼곤 곧장 돌아와서 상우를 안는다.
봄날은 가장 좋은 날이다. 그 날은 지나고 난 후에만 그 아름다움이, 그 소중함이 보인다. 은수처럼 마음이 흔들린다면, 잘 생각해보자. 어쩌면 지금 당신 곁에 그 사람이, 당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