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든 한편의 장르/철학 비빔밥
매트릭스는 말하자면 비빔밥 같은 영화다. 플라톤을 모티브로 하여 불교 철학, 유대 신화와 성경을 골고루 얹어주고 데카르트를 끼얹은 후 시뮬라크르를 살짝 뿌려 쓱쓱 비벼냈다. 모든 철학들을 하나하나 요리해서 데코레이션을 하기엔 워쇼스키 자매의 철학적 깊이가 모자랐거나 러닝타임이 부족했을 거다. ‘공각 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워쇼스키 자매를 만난 뒤 한 인터뷰에서 ‘워쇼스키는 영화를 사업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으며 실제로 사업 얘기를 더 좋아했다’라는 것으로 보아, 정말 어떠한 하나의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초안은 완성본보다 철학적인 얘기들이 많았는데 제작자 조엘 실버의 요청으로 액션 씬의 비중이 높아졌다는 썰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어쩌다 탄생한 비빔밥이라고 할지라도, 너무 완벽한 비빔밥이었다. 비행선과 내부 디자인, 매트릭스와 기계도시의 디자인은 최신 SF영화보다 더 분위기있게 다듬어져 있었고 네오의 구출과 전투씬 촬영까지, 액션을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작품이었다. 이후 워쇼스키 자매는 건드는 작품마다 흥행 참패를 거듭하며 ‘이 괴팍한 자매를 거장으로 보아야 하는가’ 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간간히 ‘브이 포 벤데타’나 ‘클라우드 아틀라스’ 같은 희망을 주는 영화를 만들고 있어 여전히 팬들은 그들의 재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실 이 영화가 성공한 것은 영화의 심오한 철학보다는 성장형 히어로물이 주는 쾌감 + 딱 달라붙는 에나멜 의상이 끝내주게 어울리는 사이드킥(트리니티) + Y2K로 혼란해진 세상에 시기 적절하게 개봉한 덕일 것이다. 덕후들이 좋아하는 모든 요소에 모두 다 해결해주지 않는 떡밥을 잔뜩 집어넣고 정갈하게 비비니 덕후와 철학자와 평론가와 일반 관객들이 모두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워쇼스키 자매는 있는 힘껏 덕질을 했는데 대중적인 취향과 기가막히게 맞아 떨어진 것.
컴퓨터밖에 모르는 샌님같은 해커 네오가 업로딩으로 각종 무술을 순식간에 섭렵하고, 간지가 넘처 흐르는 흑인 사부와 일본식 다다미 방에서 대련을 하는 장면에 환호하지 않은 덕후는 없었을게다. 초반의 무기력한 모습에서 갑자기 끝판왕이 된 네오를 보면 힘을 얻은 것이 마치 나 자신인듯 짜릿하다. 게다가 모피어스는 ‘니가 내쉬고 있는 것이 공기라고 생각하나?’라는 말로 심히 쿵푸팬더 스러운 가르침까지 내려준다. 하지만 네오는 아직 ‘각성’하지 못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머물러있다. 어딜 봐도 슈퍼히어로 1탄의 탄생 구조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모두 섞었다. 먼저 모피어스 일당이 동굴 안의 그림자를 진실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 진짜 현실을 보여준다는 대목은 ‘플라톤의 동굴’이 연상되고, 트리니티(삼위일체), 의심하는 도마(토마스) 앤더슨(son of man)이 시온(인류의 고향)을 찾아가고, 죽었다가 부활하는 네오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표현했다. 모피어스(꿈을 관장하는 신), 페르세포네(저승의 여신)으로 서양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신화를, 숟가락은 없다라는 말로 불교의 핵심 경전인 반야심경을 끼워넣는가 하면 데카르트에서 발전한 ‘통속의 뇌’를 사이버펑크 장르와 결합시켰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사실 영화 몇편 본 리뷰어(..)가 쉽게 덤벼들 수 있는 수준의 영화가 아니다. 검색해보면 매트릭스에 대한 온갖 분석이 난무하지만 모두가 너무 단정적으로 영화를 판단하는 것이 아쉬웠다.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를 가지고 신나게 설전을 벌인다. 아마 오타쿠의 주의를 지나치게 끈 탓이 아닐까 싶다.
호기롭게 매트릭스를 리뷰해 보겠다고 칼을 빼들었으나 영화를 몇번 돌려보고는 패배를 선언했다. 일단은 영화의 모든 장면이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어 리뷰를 작성한다는 것을 까먹는다는게 첫번째 문제였고, 너무 다양한 주제를 산발적으로 (그러나 어수선하지 않게) 뿌려놓았는데 이것을 하나하나 깊이 파고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소스코드나 공각기동대가 매우 심플하게 보일 정도로) 그리고 감독도 이 모든 철학을 가지고 하나의 결론이나 담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성껏 비벼봤는데 맛있죠? 재밌었죠? 같은 수준으로 다뤘기 때문에 결론을 도출해낼 수가 없었다.
이 영화는 그냥 아, 이런걸 집어 넣었구나 정도로 이해하고 관람하는 것이 최적인 듯 하다. 다른 분들은 어떤 해석을 하셨나 하고 평론가 분들의 글을 기웃기웃 해 봤으나 모든 떡밥을 통합하여 하나의 해석으로 통합한 글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이 영화를 건드리는 것은 쉽지 않은 듯 하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아무것도 없어! 라고 분노하는 분들도 있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뭔가 있기는 한데, 말로 표현될 정도로 구체화 되지 않은 개념이라고 해야하나.
하지만 이 영화가 좋은 영화인가, 묻는다면 최고의 영화들 중 하나라고 하겠다. 이렇게 상업적인 영화에서, 이렇게 상쾌하게 주저하지 않고 만점을 줄 수 있는 영화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내용을 외우고 모든 장면이 예측 될 정도임에도 나는 이 영화를 다시 관람한다. 재밌으니까. 수십, 수백개의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한 영화의 철학적 깊이에 대해 토론해 보는 것도, 이 영화를 즐기는 흥미로운 방법이 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