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각본 쓰고 감독하고 다 하는 타고난 이야기꾼, 양우석 감독
양우석 감독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가 지금까지 만든 영화는 변호인과 강철비, 단 두 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흥행력은 거의 한국 영화의 양대산맥 봉준호 감독과 비교될 수 있는 수준이다. 연출의 세밀함에서는 아직 봉준호 감독의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어쨌든 그는 관객의 선택을 받는 방법을 잘 아는 감독인 것.
그의 전작 ‘변호인’으로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오른 그는 정치적 성향이 확고하고, 그것을 구태여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번 영화에서도 최대한 보수와 진보 양쪽의 입장을 대변하려 했지만 디테일한 부분에서 진보의 성향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게 꼭 단점으로만 보이지도 않는다. 감독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영화를 만든 것이니까.
영화 최대 강점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한국의 위태로운 안보문제, 일촉즉발의 핵 위협에 대해서 다루면서도 시국을 반영한 철저한 고증에 있다. 북한이 병력 침투를 위해 준비했던 땅굴, 대전 상공에서 핵을 폭발시켜 EMP로 사용한다던가 하는 시나리오는 실제 시행되었을 경우 치명적인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북한 1호가 군부의 장군들을 숙청하고 핵을 소심하게(?) 이용하는 것에 대한 군부의 불만과 쿠데타의 가능성까지, 확률이 높다고는 볼 수 없지만 가능성은 있는 현실이다.
감독은 영화에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기 위해 몇 가지 조건을 설정했다. 그 첫째는 영화가 대선 직후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것. 현직 대통령 (보수)와 후임 대통령(진보)의 정치 철학이 충돌하는 상황을 실감 나게 표현한다. 이러한 상황 설정이 없었다면 명확한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일방적인 선택이 진행되어 양측의 반응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로는 북한 1호가 의식 불명 상태로 한국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설정이다. 이 설정을 통해 우리는 이 영화에서 예측 불가한 성격을 가진 지도자 김정은 위원장을 빼고 온전히 상황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설정들이 영리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난의 화살을 어느 쪽으로도 돌리지 않으면서 남북 간의 갈등을 다루게 하기 때문이다. 북측과 남측에는 절대 권력을 가진 통수권자가 존재하지 않게 만들었다. (실제 상황과 겹쳐 특정 인물을 비난하지 않기 위한 시도일 수도 있겠다.)
셋째는 곽철우가 ‘땜빵용 자리’에 있다는 설정이다. 이 설정을 통해 감독은 곽철우의 입을 빌어 이 영화의 주제를 대놓고 ‘강연’ 할 수 있게 했다. 만취한 곽철우가 ‘핵은 핵으로만 막을 수 있다는 것 다 알지 않냐’라고 푸념하는 것도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비대칭 전략무기는 보유만 하고 있어도 엄청난 힘을 발휘하니까. 시간이 남아도는, 책임 있는 청와대의 간부였다면 이런 강연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독은 북한이 복잡한 국제정세 상 ‘주적’ 임을 기억하면서도, 그들이 언젠간 하나가 되어야 할 동포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당부한다. 때때로 국가 전력을 비교하며 ‘북한군은 노후하고 낙후되었으며, 핵을 봉쇄하고 선제공격하면 손쉽게 승리할 수 있다’던지, ‘핵개발 이전 먼저 선수를 쳤어야 한다’던지 하는 사람이 있는데, 감독은 그 사람들을 겨냥해 ‘그렇게 또 피로 물들이고 우리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극 중에서 보수 대통령 이의성은 북한을 선제공격한 이후에는 수복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이 땅에 다시 전쟁이 난다면 당연하겠지만 적화통일도, 국군의 국토 수복도 불가능하다. 한국 국민, 혹은 북한 주민이 내 형제 가족을 죽인 ‘점령군’을 인정하겠는가?)
영화는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호평을 받고 있지만 ‘명작’이라고 칭하기엔 아쉬운 점이 꽤 존재한다. 첫째로, 극을 빠르게 진행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투입된 억지스러운 만남들. 곽철우가 ‘아 오늘 나 인기 짱이네’하는 장면은 겹치는 우연으로 극을 진행하는 감독이 민망해서 하는 혼잣말처럼 들린다. 또, 북한 1호와 같은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충성심 높은 엄철우가 리태한 정찰총국장의 ‘귀환하라’는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명백한 시나리오의 구멍으로 보인다.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내려와 엄철우의 눈앞에서 북한 1호를 암살하려고 시도하고, 엄철우가 리태한 대장에게 귀환한다? 리태한 대장이 조금만 의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어도 ‘강철비’의 마지막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게다가 리태한 대장의 진의를 깨닫는 장면은 힘을 빡 주고 만들었어야 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러닝타임이 2시간 20분 가까이 되는 영화다 보니) 보다 보면 조금 김새는 느낌이다. 또 김의성 배우에게서 카리스마가 느껴지지 않는 것도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김의성 배우가 '형, 난 지금이 제일 편안해'라고 하는데 배역에서 어떤 품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양우석 감독이 약간 진보 성향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일부러 보수 대통령의 역을 맡은 김의성 배우에게서 힘을 뺐을지도 모르지만, 판단은 관객이 하도록 두어도 되지 않았을까? 김의성 배우는 떼를 쓰는 게 아니라 이경영 배우와 멋지게 철학적 대결을 했어야 하는데 '국민의 목숨을 걸고 50%의 확률 게임을 하자는 거냐'는 그의 대사는 비겁해 보일 뿐이다. 힘이 실리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의 수호를 제1가치로 놓아야 하는 대통령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었음에도.
또 강철비의 소재는 어딘가 국뽕(?) 소설가로 유명한 김진명 작가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북한의 핵을 양도받는다는 설정은, 아무리 북한 1호의 신병이 남측에 의해 확보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믿기 힘든 ‘낭만적 결과물’이다. 남북 평화를 담보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으로 개발한 핵을 양도한다?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약간의 허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오락영화’ 그 이상을 보여 준다. 두 철우의 믿음과 우정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주었고, 엄철우와 최명록의 대결과 밀도 있는 총격전으로 액션 스릴러의 품격도 갖추고 있다. 곽철우의 고군분투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첩보물의 모습과 미, 중, 북, 일과 한국의 첨예한 대립으로 정치 드라마의 면모도 갖췄다.
‘강철비’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 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이 땅에 발 딛고 살며 사는 한국인이라면 꼭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만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우리의 생각이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민주국가에 살고 있고, 현 대통령과 차기 대통령으로 보여지는 대립에 한 표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나쁜 보수도, 나쁜 진보도 존재하지 않는다. 썩은 정치인이 존재할 뿐. 당신이 어떤 철학을 지지하는가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렸다. 그리고 당신의 한 표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굉장히 다른 선택을 할 대통령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기억하자,
“분단국가 국민들은 분단 그 자체보다 분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에 의해 더 고통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