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추한 것도 아니다. 별은 그냥 별일 뿐.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서지우에게 적요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더러운 스캔들'일뿐이다.
이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도, 서지우와 같은 생각인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만들어지면 안 될, 더러운 영화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을 보았다. 남성의 로리타 콤플렉스를 아름답게 꾸며낸 추잡한 영화라고.
하지만 이 영화는 절대, 더럽지 않다. 모든 의견은 똑같이 존중해야 마땅하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고집을 부려보고 싶다. <은교>는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아름다운 사랑 영화이기 때문에.
시는 함축적이고, 단어와 단어 사이 행간이 숨겨져 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문장이 아닌 그 사이에 숨은 행간을 읽는 행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짧은 문장 뒤에 숨겨진 호흡, 같지만 다르게 들리는 문장.
보이는 것만 이해하는 사람에게, 같은 공장에서 같은 재료로 만든 거울은 모두 같은 거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는 그 안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늙고 추레한 70대 노인의, 미성년 소녀를 향한 사랑은 더 들을 것도 없이 추악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랑이 모두 같은 사랑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사랑이 추악한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었는지 더 들어봐야 한다.
감독은 시를 이야기하며, 적요에게 내리는 유죄 판결을 잠시만 유보해 달라고 관객에게 부탁한다.
카메라는 세심한 촬영으로 은교의 아름다움을 담는다. 새하얗고 투명한 피부, 탄탄하고 매끈한 다리, 쇄골 위로 흐르는 땀방울. 카메라는 충실하게 그 아름다움을 부각시킨다. 자, 이제 생각해보자. 아름다움은 추악한 것인가?
아름다움 자체는 좋은 것(善)이지만, 그 카메라는 적요의 시선이었기 때문에 더럽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요는 그 아름다움에 대해 자신의 어떤 의견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 시선에 더러움의 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적요의 시선이 아니라 관객의 편견인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 어떤 예술품도 흉내 내지 못할, 인간의 본능에 새겨진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운 육체를 볼 때 자연스럽게 경탄을 내뱉는다. 그리고 그 순수한 경탄에는 선함도, 악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시선에 반사적으로 '추악함'을 대입한다. 그 시선의 주체가 아름답지 않을 때.
물론 은교의 육체는 감상되어지기 위해 전시된 예술품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상이 시선에서 불쾌함을 느낀다면, 그 시선을 거두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같은 시선이라도 누구의 시선인가에 따라 느껴지는 불쾌감이 다르다는 것이다. 70대 노인의 시선은 분명히, 추악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노인은 육욕에 물든 여느 70대 노인이 아니다. 그것은 이적요 개인의 시선이고, 그 의미는 그 자신밖에 알 수가 없다. 그것을 추악하다고 손가락질하면 우리는 '늙음이 잘못으로 인한 죄'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내가 본 적요의 시선은 더럽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그저 거부할 수 없는 생명력의 요동을 경외하는, 마치 신앙인이 신성한 경전에 발을 내디뎠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아름다움을 향한 조건 없는 찬양. 이것도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할까.
그 소리가 연필들이 내는 울음소리 같더구나. 그러니까 내게 연필은 눈물인 거지. 할아버지, 제 연필 좀 깎아주세요 라고 네가 말하면, 나에겐 그 말이 이렇게 들린단다. 할아버지, 제 눈물 좀 닦아주세요.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적요는 은교를 사랑했지만, 은교를 욕망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흐르는 음악이 그 감정을 표현해주는데, 밝은 햇빛 아래서 은교를 볼 때면 맑고 청아한 음이, 비 오는 날 은교의 바짓가랑이를 훔쳐볼 때는 기괴한 음악이 흐른다.
적요가, 은교와 섹스를 하고 싶었을까? 아마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을게다. 하지만 적요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내가 갈망하는 젊음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그녀가 갈망할, 그녀에게 줄 젊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름답지 않다. 젊음, 그리고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고 은교 또한 나 같은 늙은이보다는 아름다운 육체를 원할 것이다. 그녀가 늙고 추한 내 몸뚱아리에서 욕망을 느낄 리 없다. 그래서, 적요는 꿈을 꾼다.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젊음이 있었던 그때 그 시절의 꿈.
욕정은 추악하지 않다. 젊음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감히 쳐다볼 수 없는' 하찮은 존재가 자신에게 욕망을 느끼는 것에 불쾌함을 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추한 것이 아름다운 것을 욕망한다고 해도 그것은 죄가 아니다. 죄는 추함이 아름다움을 그대로 놓아두지 못하고 (그의 의지에 반해) 움켜쥐려고 할 때 생겨난다.
이 생에서 그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말 그대로 늙은이의 추악한 욕망일 뿐이다. 적요는 그 아름다움에 대한 고백을 글로 옮겨, 자신 혼자만 간직하고 살기로 결심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니고, 명성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은교를 향한 절절한 사랑,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마음을 가슴속에만 담아둘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글을 썼다.
만약 현실에 적요와 같은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영화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를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은교에게 줄 젊음이 없지 않은가. 그에게는 은교에게 보답할 아름다움이 없지 않은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젊음에 경탄하고 무릎 꿇은 이라면, 그녀의 몸을 탐하는 대신 신성하게 받들 것이다. 적요가 그랬듯이. 그러니까 이 영화가 로리타 콤플렉스를 합리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은 온당하지 못하다.
돌이 마음을 가지고, 연필이 슬프고, 운동화가 애달플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에게는 글로 옮겨진 이,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가 더러운 스캔들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러운 것은 사랑이 아니라, 육욕을 위해 훔치고 빼앗고 모욕하는, 합당하지 않은 것에 대한 탐욕이다.
그래서 적요는 자신의 신성한 신전에 흙발로 들어선 이교도, 서지우를 처단하기로 마음먹는다. 만약 그가 자신의 글을 훔치지 않았다면, 은교가 지우에게 자연스러운 사랑의 감정을 느껴 둘이 맺어지게 되었다면 적요는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지우는 도둑놈이다. 세상 떠나는 날까지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싶었던 그 아름다운 문장을 서지우는 자신의 젊음을 자랑하며 육욕을 채우기 위해 사용했다. 그리고 나의 신성한 은교는 자신의 그 문장에 의해 희생되었다.
세상은 다면적이다. 어떤 스캔들을 보았을 때,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위치에 서서 그를 판단하기보다는 (귀찮더라도) 그 이면(裏面)을 보았으면 좋겠다. 특히 이렇게 점점 좁아지는 세상 안에서는 우리가 섣불리 내린 판단이 돌팔매가 되어 사람을 해칠 수 있으니까.
같은 것을 보더라도 각자 떠올리는 이미지는
때로 이승과 저승만큼 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