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크 질렌할의 인생영화가 왔다
제이크 질렌할의 인생영화가 왔다
포토그래퍼 김홍희 씨는 자신의 저서, <나는 사진이다>에서 카메라를 총에 비유했다. 침착하게, 떨리지 않는 손으로 피사체(목표)를 겨누고, 숨을 골라 필름을 끊는다. 방아쇠를 당기듯. 다른 점이 있다면 카메라는 피사체를 죽이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여기 맹점이 있다. 카메라는 사람을 죽이지 않지만 카메라 뒤의 인간은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새끼 새를 찍겠다고 둥지를 망치는 인간이나, 달동네의 불행을 카메라에 담아 '감성'의 이름으로 파는 이들. 그리고 싸구려 인정이나 복수심 따위를 위해 '리벤지 포르노'를 유포하는 이들같은. 총과 칼도 사람을 구하는 일에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엇을 들고 있는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은 듯 하다.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 이라고 쉽게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카메라가 기록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아주 짧은 진실의 조각일 뿐이다. 우리가 SNS의 유명 맛집이나 사진 등에서 볼 수 있듯, 카메라 뒤에는 진실을 담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내기 위한 무던한 노고가 들어있다. 그리고 그렇게 조작된 그림은 '더 좋은 컨텐츠'가 되며, 컨텐츠를 가진 이는 권력도 손에 쥐게 된다.
그래서 <나이트크롤러>의 루이스 블룸(제이크 질렌할)은 몇차례에 걸쳐 '주작'스킬을 향상시킨다. 처음에는 자극적인 현장에서 촬영만 하다가, 총격을 당한 가정에 몰래 잠입하여 가족 사진을 슬쩍 탄흔 옆으로 밀어넣는다. 아슬아슬하게 사진을 빗겨간 총알은 마치 사건의 긴박함을 보여주는 듯 자극적이다.
두번째 조작은 조금 더 대범하다. 사건 현장에 도착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구도'가 나오지 않자, 과감하게 시체(인지 살아있는 사람인지 모를)를 질질 끌어 원하는 구도를 만들어낸다. 사진을 옮기는 것은 그렇다고 치고, 시체를 질질 끈다고? 루이스의 성장을 '세상이 다 그런 거지'라며 지켜보고 있던 관객들은 여기서 슬슬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감독은 결국 사건을 만들어내는 루이스의 섬뜩한 시선으로 관객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sns와 인터넷이 발전하기 전에 비하면 거대 언론의 힘은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뉴스를 보고 기사를 읽는다. 아니, 오히려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현재의 언론은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정말 도움이 될 수 있는 법, 예산, 교통, 교육은 22초에 담고,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자극적인 사건 사고 등은 특집으로 다룬다.
150만원이면 허위 사실로 가득한 기사를 14분만에 네이버와 다음에 띄울 수 있다. (이것은 이번에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실험한 것이고, 필자가 아는 경로를 통하면 30만원이면 기사 5개를 낼 수 있다) 그나마 규모가 있는 회사에서는 허위 보도가 나가면 문제가 되니 알아서 팩트체크를 하는 편이지만 사기꾼들은 돈을 뿌리고 뉴스의 신뢰도를 통해 더 큰 이득을 얻는다.
그렇다고 해서, 기자를 손가락질 하는게 옳은 일일까? <스포트라이트>의 편집장 마티 배런은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을 노려야 한다고 했다.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부품일 뿐이다. 한 가정의 경제적 책임을 지고 있는 이가 직업 윤리를 지키기 위해 시스템에 맞서 싸우는 것은 영화에나 존재하는 일이다. 시스템에 맞서는 이는 (99.999%의 확률로) 땅콩 회항사건의 박모 사무장의 꼴이 난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이라면 시스템에 대항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윤리를 지키지 않은 기자를 향해 '기레기'라고 조롱한다. 사실, 그들도 그냥 평범한 직장인들 중 하나일 뿐인데도.
루이스를 보면 섬뜩하지만, 어색하지는 않다. 우리 주위에서 루이스와 같은 사람을 많이 봐 왔기 때문일까. 적지 않은 수의 관객들은 심지어 루이스의 방식에 공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무섭고 섬뜩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감독은 루이스의 성공기를 보여주면서 어둡거나 음산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응원이라도 하듯 진취적인 빠른 비트와 현란한 편집으로 그의 레벨업을 '흙수저 성공기'마냥 추켜세운다.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에 빵! 하고 터져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반면 릭은 불쌍하고 한심하게 그려진다. 능동적이지도 않고, 자기 어필을 할 줄도 모르며,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 되는 대신 '한건 터트리는' 루이스 옆에 달라붙어 성공의 단물을 빨고자 한다. '부사장'이라는 직책에 홀린듯 빠져들고, 루이스가 얼마를 벌고 있는지, 내가 하는 역할은 어느정도며 얼만큼을 요구할 수 있는지 전혀 파악하고 있지 않다. 일당 100달러를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서 겨우 75달러를 부른 그는, 딱 그만큼의 존재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루이스를 추켜세우고, 릭을 깔아뭉겠다. 그리고 루이스는 성공을, 릭은 죽음을 맞게 한다. 이게 사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들에서는 정의가 승리하기도 하지만 현실에 그런 일은 거의 없다. 정의도 승리하기 위해서는 개싸움을 벌여야 한다.
이 영화에서 '성공을 향한 광기'는 루이스>니나>조>릭의 순서로 낮아진다. 여기 어딘가에 우리 관객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성공을 하는 다른 방법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우리는 우리의 양심과 비정함 사이에서 얼마나 타협할 수 있을까?
당신은 누가 되고 싶은가? 라고 감독이 물었다. 성공가도를 달리는 루이스? 그런 루이스와 공생하여 성공하는 니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거절하며 패배자의 인생을 사는 조? 노력도 열정도 없이 버려지는 릭?
아마,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루이스와 니나쪽은 아닐 듯 하다. 그리고 그래서 꽤 슬프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공과 거리가 먼 사람일테니까. 난 누군가를 밟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에게도 성공에 대한 열망은 있다. 괴물이 되지 않는, 타협하지 않는 이가 더 인정 받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