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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an 06. 2020

[굿윌헌팅] 그에겐 두 명의 아버지가 있었다.

<굿 윌 헌팅>의 맥과이어 박사가 보여준 진짜 부모의 자질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누구나 부모는 처음 해보거든요. 무작정 잘해주기만 해서도 안되고, 권위적으로 아이를 억압해도 안된답니다. 완벽한 균형을 지키면서 너무 버릇없지도 않게, 너무 소심하지도 않게,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게.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부모가 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영화 <굿 윌 헌팅>이 아주 좋은 예시가 되어 줄 듯합니다. 이 영화에는 두 명의 ‘아빠’가 있거든요. 그리고 그 아빠들 중 한 명은,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만큼 인생의 멘토로 사랑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로빈 윌리엄스가 분한 '맥과이어 박사.'


어디서 자주 들은 것 같은 흔한 위로의 말. 하지만 맥과이어 박사의 이 말은 무게가 다릅니다. 출처:굿 윌 헌팅


한 명의 ‘아빠’는 랭보 박사(스텔란 스카스가드)입니다. (<님포매니악>의 변태할배, <토르> 시리즈의 셀빅 박사, <체르노빌>의 그 배우 맞습니다) 랭보 박사는 수학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 필즈메달의 수상자죠. 그는 학생들을 시험하기 위해 아주 어려운 수학 난제를 복도의 칠판에 적어두었다가 학교의 청소부 윌(맷 데이먼)이 그 문제를 풀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제자로 거두려고 합니다. 그가 보기에 윌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비뚤어진 성격으로 사고를 치고 다니는 한심한 인물이었습니다.


윌이 가진 수학적 재능을 묻어둘 수 없다며, 랭보 박사는 갱생 프로젝트 ‘프로젝트 윌’을 시작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자신과 함께 수학 공부를 하며 재능을 키우고, 한 번은 심리상담가를 만나 그의 반 사회적 행동을 교정하는 거죠. 하지만 윌은 심리상담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네요. 윌은 그의 뛰어난 지적 능력을 활용해 상담가를 도발합니다. 심리 상담가 놈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이해해줄 것처럼 다가와서는 한 두 번의 농담도 넘기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냅니다. 마치, 그를 사랑해주겠다며 데려갔다가 파양을 결정했던 그의 양부모들처럼요. (영화 초반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윌은 고아로 자랐고 어린 시절 세 번이나 파양을 당했습니다)


랭보 박사는 자신이 아는 모든 심리학 교수들에게 부탁했지만, 그 누구도 윌의 괴팍한 장난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과 약간은 껄끄러운 관계였던,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천재 맥과이어 박사에게 윌을 부탁하기로 합니다. 윌과의 첫 만남 이전, 랭보 박사는 맥과이어 박사에게 경고합니다.


“포커 게임처럼 생각해. (윌을 이기려면) 윌에게 빈틈을 보이지 마.”






예상했던 것처럼, 윌은 맥과이어 박사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그를 몰아붙입니다. 방을 둘러보며 ‘당신은 쓸데없는 책들만 읽었군요.’라고 하고, 방을 휘젓고 다니며 발견한 그림을 평가하며 그가 불안해 보인다고, 금방이라도 자신의 귀를 잘라버릴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맥과이어 박사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대신 웃어넘기며 ‘당장 프랑스 남부로 이사 가서 빈센트로 이름 바꿀까?’라고 유머를 던집니다.


랭보 박사는 ‘빈틈을 보이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맥과이어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무장해제하고,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고 인간으로서 윌에게 다가갑니다. 자기도 상처 받을 수 있는 인간이라고. 그는 윌을 이기고 싶지 않습니다. 윌을 이긴다고 윌을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으니까요.


내 눈에는 네가 지적이고 자신감 있어 보이기보다는 오만 가득한 겁쟁이 어린애로만 보여. 하지만 넌 천재야. 그건 누구도 부정 못 하지. 그 누구도 네 지적 능력의 한계를 측정하지 못해. 그런데 넌 달랑 그림 한 장 보고서는 내 인생을 다 안다는 듯 내 아픈 삶을 잔인하게 난도질했어.
너 고아지? 네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고, 네가 뭘 느끼고 어떤 사람인지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어보면 다 알 수 있을까? 그게 널 전부 설명할 수 있어?


답은 텍스트 안에 있지 않다, 그 간단한 진리를 윌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너는 모든 걸 알지만, 아는 것과 몸으로 느끼는 것은 완전히 다르단다. 너는 예술과 사랑과 전쟁을 현란한 말솜씨와 지식으로 주워섬길 수 있지만, 사실은 들키고 싶지 않은 거야.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삶에 있어 중요한 것들 중에서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단다. 모든 것은 텍스트가 아닌 콘텍스트(맥락, 혹은 행간)에 있는 거야. 올리버 트위스트가 너에 대한 중요한 것들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듯이.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두 사람은 조금씩 스몰 토크를 시작합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 중요한 내용은 없어요. 맥과이어 박사는 자신의 사별한 와이프가 자다가 뀐 방귀에 스스로 놀라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윌에게 말하고, 자지러지게 웃죠. 그리고 또 말합니다.


"아내가 세상 떠난 지 2년이나 되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런 것들 뿐이야. 멋진 추억이지. 이런 사소한 일들이 말이야. 제일 그리운 것도 그런 것들이야. 나만이 알고 있는 아내의 사소한 버릇들."


이야기를 들으며 윌의 표정은 복잡해집니다. 처음으로, 윌이 타인에게 연민을 느낀 겁니다. 내가 모욕했던 그 아내가 이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살아 숨 쉬는 인간이 되었으니까요. 그녀가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병간호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말에는 다가오지 않던 맥과이어 박사의 사랑이 이제는 느껴집니다. 세상에 어떤 것에도 존중을 보여주지 않던 윌도 이제 맥과이어 박사의 아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조심스러워집니다. 장족의 발전이네요.






자, 영화는 이렇게 두 사람의 아빠에 대해서 소개해 주었습니다. 첫 30분은 랭보 박사가 극을 이끌어 나가고, 두 번째 30분은 맥과이어 박사가 누구인지를 보여줬어요. 이제 윌을 둘러싼, 두 아빠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랭보 박사는 빨리 윌을 치료하고 그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해 달라 합니다. 맥과이어 박사는 아직 윌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그런 식으로 윌을 조종하려고 하면 일을 그르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봐, 나도 매일 밤 어떻게 하면 그 애를 망칠까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게 아니야."
"그 애가 원하는 건 다른 것일지도 모르잖아. 세상에는 빌어먹을 필즈상보다 값진 게 많아."


세상에 어떤 부모도, 아이를 망치기 위해서 아이를 키우진 않겠죠. 아이들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윌에게는 너무 확실하게 보여요. 랭보 박사가 아까워하는 것은 윌이 아니라 윌의 재능입니다. 반면 맥과이어 박사는 윌의 재능보다는 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맥과이어 박사는 윌이 양치기가 되건, 일용직 노무자로 살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윌의 마음 안에서, 진짜 자신의 재능을 펼쳐 보이고 싶은 욕망을 발견합니다. 그걸 윌이 스스로 인정하고 자신이 행복한 길을 찾았으면 좋겠는데 윌은 뒷걸음질 치죠.



“윌이 왜 그런다고 생각하나? 이유를 생각이나 해 봤어?”
“그런 문제쯤은 알아서 극복할 거야.”
“이봐, 내 말 잘 들어. 왜 현실을 회피하고 왜 아무도 못 믿을까? 그건 그를 사랑해줘야 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야. 이 애가 어떤 애인지 아나? 사람들이 자기를 떠나기 전에 먼저 떠나게 만들고 있어. 방어 메커니즘이라고. 알겠어? 그 때문에 20년이나 외롭게 산 애야. 지금 자네가 그 애를 몰아치면 또 그 악순환이 반복돼.”



이 글을 읽고서, 아, 영화 한 편 다 봤네,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까요? 영화 리뷰를 쓰면서 항상 걱정하는 것은 그거예요. 영화는 직접 봐야 그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신은 디테일 안에 살고 있고, 정말 중요한 메시지는 항상 작품 안에 있으니까요.


영화가 주는 감동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느끼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두드리지만, 글을 쓰고 나면 참 초라하게 느껴져요. 와, 이 심오한 감동이 언어로 표현되면 이렇게밖에 되지 않는구나. 하긴, 몇 줄 글로 생각을 전달할 수 있으면 세상에 누가 소설을 쓰겠어요. 누가 영화를 만들겠어.


그러니까 아직 <굿 윌 헌팅>을 보지 않으셨다면, 지금 바로 한번 감상해보세요. 그리고 이미 본 작품이라고 해도, 시간을 내서 천천히 음미하면서 다시 한번 감상해 보세요. 그때 내가 본 그 영화랑 많이 다르게 느껴질 거예요. 특히, 극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영화를 감상했다면 그 감동은 또 많이 다를 거예요.


영화의 감동을 리뷰에 담을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건 누구도 못해요. 글을 읽고서 두 사람의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하며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리뷰어의 역할은 그것으로 충분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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