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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an 07. 2020

[비포 미드나잇] 다시 사랑을 시작할 마지막 기회

<비포 미드나잇>으로 보여주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결론




20대에 만났던 짧고도 아름다웠던 사랑이 30대에 다시 만났을 때, 여전히 애틋한 제시와 셀린느를 보고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그렇게 헤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만남을 유지했다면 어땠을까. 과연 그렇게 애틋한 감정이 10년을 함께 지내면서도 남아 있었을까, 하고요. 그래서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은 일면 현실적으로 보이면서도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둘은 함께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다시 10년이 지났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낭만적이었던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느는 <비포 선셋>에서 서로 다른 현실을 살고 있었고, 그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의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10년 만에 돌아온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비포 미드나잇>에서 이 두 사람의 현실을 하나로 합쳐버립니다. 두 현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요.






셀린느는 프랑스를 고향으로 두고 있고, 제시는 미국 사람입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그렇게 계속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미국 남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두고 사랑을 찾아 프랑스로 건너옵니다. 다행히, 그는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었고, 어디서 일을 하건 돈은 꾸준히 들어오거든요.


직업문제는 그렇게 해결되었지만 <비포 선셋>에서 확인했던 또 하나의 현실, 아들 '헨리'가 못내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고 보니 <결혼 이야기>의 아들 이름도 헨리군요. 이혼 부부의 아들은 헨리여야 하는 건가요?) 제시는 셀린느와 함께 하기 위해 미국을 떠나야 했고, 귀책사유는 제시에게 있는 것이 분명한 바, 법원에서 제시에게 양육권을 줄 리 없죠. 그래서 헨리는 약간 미친 사람처럼 묘사되는 엄마와 살게 됩니다.






영화는 제시가 헨리를 미국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헨리는 여름방학 동안 제시 가족과 그리스에서 휴가를 보냈지만 학교는 시카고에서 다녀야 해요. 제시는 자신이 헨리를 내팽개치고 새 삶을 찾아 셀린느에게 왔다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모양입니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제시는 셀린느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게 더 무책임하지 않나요?  혼잣말을 듣는 상대방은 어쩌라고.  출처: 비포 미드나잇


셀린느가 제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제시의 말을 해석해 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듣고 보니, 이렇게 살지 못하면? 시카고로 가겠다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먼저 선수를 칩니다. '난 시카고로 안 가.'



제시의 현실이 ‘우리’의 현실과 대치되는 순간. 시한폭탄은 정말 작동을 시작했습니다.  출처: 비포 미드나잇


이 문제를 가볍게 보면 셀린느의 과잉반응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헨리는 사실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제시가 두고 온 현실이니까요. 하지만 여기에도 현실은 있습니다. 셀린느와 제시의 쌍둥이 딸. 그들의 싸움이 격해지려는 순간, 딸들이 잠에서 깨어 싸움을 중지시킵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우리의 현실이 충돌을 막아낸 거죠.






제시의 전 부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제시는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혼전임신을 시킨 나쁜 놈입니다. 결혼 당일날 조차도 첫사랑 생각뿐이었다 하고요. 게다가 북투어를 떠나서 첫사랑을 만났는데, 이혼에 대한 어떠한 의논도 없이 첫사랑 셀린느와 다시 만났다고 섹스까지 합니다. 그리고는 도저히 이렇게 못 살겠다고 다 버리고 새살림을 차리죠. 이 정도면 살인이 나도 무죄로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 어쩌고 가 우리의 윤리의식을 마비시킵니다. <비포 미드나잇>의 두 사람은 너무 사랑스러운 현실 부부니까요.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싸우고, 금세 또 잊고, 남들이 볼 때는 다시없을 사랑꾼 커플로 보입니다. 하지만 제시는 또 바람을 피웁니다. 그때와 같이, 또 북투어에서요.




어쨌든, 한 번도 포개어진 적 없던 두 사람의 현실이 9년간 공존해 왔습니다. 놀라운 일이죠. 사랑의 유효기간은 고작해야 2년이라고 하는데 9년이나 유지해 왔으니까요. 그런데 그 사랑도 이제는 끝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불만, 억울함, 서로의 희생, 그리고 잊고 있었던 현실이 돌아온 순간 이들의 관계는 파국을 맞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랑이나 영원한 사랑 따윈 없다.  출처: 비포 미드나잇


이 영화는 영원한 사랑과 결혼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들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연인들이 보기에 좋은 영화일까요? 글쎄, 제 지인 중 하나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은 낭만적이라서 좋았는데, <비포 미드나잇> 너무 현실이야. 누가 그런 걸 영화에서 보고 싶겠어.


저는 연인들에게 우울한 영화들을 많이 추천합니다. <라이크 크레이지> 라던가, <결혼 이야기>, <러브 비하인드>, <라라 랜드>, <블루 발렌타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혹은 <우리도 사랑일까> 같은.(<완벽한 타인>도!)  두 사람이 바람도 피우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도 겪지 않고, 사랑이 식거나 어긋나 버리지도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현실이란 건 그렇지 않으니까요. 사랑을 해서 결혼을 했으나 뒤늦게 '진정한 사랑'을 발견할 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거죠? 결혼하기 전, 그런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비포 미드나잇>을 소개합니다. 현실은 이 영화보다 훨씬 더 못됐으니까요. 두 사람은 분명 현실의 대부분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운 사랑꾼들인데도 저렇게 싸우잖아요. 이런 현실에 대한 생각을 한 번도 해보고 있지 않다가 얻어맞는 것보다는, 예방주사다 생각하고 같이 보는 거죠. 우리가 저 상황이면 어떻게 했을까? 나의 현실과 너의 현실은 얼마큼이나 차이가 날까? 사랑을 위해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자신의 현실을 버려야 한다면, 앞으로도 쭉 괜찮을까?


영화는 이 엉망진창 부부가 갈라서는 모습도 보여주지만 어떻게 해야 사랑을 지켜낼 수 있을지에 대한 조언도 건네줍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너무 늦기 전에, 최선을 다해 진심을 보여주는 것. 사랑 앞에서는 그 어떤 일이라도 사소한 일이 될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 미워도 그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못 이기는 척 다시 상대를 받아주는 것.



9년에 한번씩 들려주는 이야기, 비포 시리즈는 <비포 미드나잇>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혹자는 이후의 이야기도 또 나올 것이라고 2022년을 기대하고 있지만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제시와 셀린느 커플에게는 다시 한번 극복해야 할 현실이 없으니까요. 글쎄, 죽음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영화는 결혼을 하기 전 반드시 보아야 할 영화입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이번주 목요일 영화 토론 커뮤니티 자올에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예정이니 한번 참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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