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최악까지도 함께할 수 있는가 묻는 영화, <블루 발렌타인>
최근, 날이 추워서 그런지 경제 한파 때문인지 (아니면 나이가 나이인지라...?) 주변에 결혼을 하고 싶다는 사람이 부쩍 늘었습니다. 많이 외로운가 봐요. 그렇게 제게 ‘결혼하고 싶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저는 항상 같은 대답을 해 줍니다.
‘결혼은 지옥인 거, 알고 계시죠?’
사람들이 대답한다.
‘아니, 다들 그렇게 얘기하는데 꼭 지옥이라는 법은 없잖아요. 나는 안 그럴 수도 있지.’
물론 결혼은 지옥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담할 수 있어요. 가끔은 지옥이 될 겁니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삶은 가끔 지옥이잖아요? 결혼을 한다고 해서 내가 지닌 '삶'이라는 지옥이 마법처럼 극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서로의 지옥을 떠안아야 하니까, 행복도 두배 지옥도 두배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결혼을 하고 싶은 분들은 반드시 지옥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지옥으로 들어왔는데, 심지어 그 지옥불을 만들어내는 것이 눈 앞의 배우자인데 당신은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까요? 그 지옥불에도 함께 하고 싶으세요?
만약 '그렇다'라고 대답하신 분이라면, 결혼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니, 이 사고 실험에서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결혼에 성공할 확률은 조금 더 높아졌을 겁니다. 예상된 불행은 그렇지 않은 불행보다 훨씬 덜 잔인한 법이니까요. 이게 바로, 결혼을 욕망하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당신이 '결혼이 지옥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합리적 근거'입니다.
(큰 기대 안하고 결혼했는데 예상외로 행복하면= 이득, 결혼이 천국이라고 생각했는데 불행하면= 손해)
오늘의 이야기는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으나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을 선택한 두 사람, 그리고 예상보다 강력한 지옥불에 크게 데고 끝으로 치닫는 두 사람의 이야기, <블루 발렌타인> 입니다.
(인생 영화를 추천해주신 브런치 작가, Lion Kid님께 감사드립니다)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영화입니다만, 영화의 캐스팅이 아주 훌륭했습니다. <노트북>과 <라라랜드>를 통해 비운의 연인에 적합함을 증명한 라이언 고슬밥이 남주를 맡았고, 그리고 여주에는 무려 미셸 윌리암스를 캐스팅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36살의 나이에 아카데미에 네 번이나 노미네이트 된 '작품성 판독기'같은 분이죠. 특히 미셸 윌리암스는 <브로크백 마운틴>과 <우리도 사랑일까>을 통해 결혼이라는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그녀만 한 사람이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이 배우들을 데리고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이 만든 이번 작품은 각본, 색감, 구도, 연기, 편집까지 완. 벽.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명작의 조건, '감독의 메시지', '흡입력', '임팩트'까지 다 살려냈어요. 보고 오실 분들은 글을 잠깐 끊고, 지금 감상하고 오시길 바랍니다. (물론 읽고 보셔도 상관없습니다) 넷플릭스엔 없어요, 왓챠에만 있습니다.
이 영화는 순차적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두 개의 이야기가 같이 흘러가요. 신디의 사랑이 완전히 식어버린 현재와 그들이 사랑을 시작하던 순간을 교차적으로 보여주죠. 어디서 많이 보던 기법 같지 않나요? 마크 웹 감독이 <500일의 썸머>에서 썼던 편집과 비슷합니다. <500일의 썸머>도 우리를 최고의 순간으로 데려갔다가, 바닥으로 추락시켰다가를 반복하면서 슬픔과 기쁨을 함께 느끼게 했었지요.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500일의 썸머>의 교차편집은 시간을 접어 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행동하는 썸머와 톰을 풍자하는 용도로 쓰였지만 <블루 발렌타인>에서는 씁쓸한 감정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먼저 신디를 볼까요. 신디는 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식은 지 오래됐어요. 딸과 바보 같은 장난을 치는 딘도, 피곤한데 잠을 깨우는 딘도 마치 '벌레 보듯' 쳐다봅니다. 저 한심한 자식, 이라는 표정이에요. 영화 초반에 강아지 '메건'을 잃어버리고 그 강아지가 로드킬을 당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강아지가 신디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딘은 '내가 문 잠가놓으라 몇 번을 말했잖아!'라고 했지만 신디는 자신의 마음이 도망가도록 슬쩍 놔주었고, 신디의 (딘을 향한) 마음은 아무도 모르는 새 죽어버린 거죠. 물론 신디가 의도한 바는 아녔습니다. 강아지의 죽음에 신디도 눈물을 터뜨립니다. 나도 이렇게 사랑이 식을 줄은 몰랐어.
두 사람의 갈등은 죽은 강아지에 대한 기억을 피해 러브호텔로 가면서 시작됩니다. 딘은 신디의 말을 들은 체도 않고 자기 고집대로 러브호텔을 예약하고, 신디는 그 고집을 꺾지 못하고 러브호텔로 갑니다.
딘은 러브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또 어린애처럼 이해할 수 없는 장난을 치고, 신디는 그런 딘이 여전히 못마땅합니다. 신디는 딘과의 말싸움을 포기하고 샤워를 하러 들어가죠. 딘은 그런 신디를 바라보고 있다가 야릇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는지 옷을 벗고 따라 들어갑니다. 신디를 만지려 했지만 신디는 더러운 것이 닿은 것처럼 깜짝깜짝 놀라며 피하죠.
영화는 시간을 돌려 신디와 딘의 첫 만남으로 관객을 데려갑니다. 딘은 신디를 보고 첫눈에 반했고, 자신의 직업이나 처지 같은 것은 아랑곳 않고 신디를 꼬시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버스에 앉은 신디에게 다가가 농담을 하고, 같이 내려 우쿨렐레를 뜯으며 노래를 불러주고. 신디는 그 우쿨렐레에 맞춰 탭댄스를 춥니다. 이 장면은 아마 영화에서 가장 설레는 장면일 거예요.
그 장면이 끝나기가 무섭게 감독은 싸구려 러브호텔로 우리를 돌려놓습니다. 차가운 푸른 톤의 조명이 지배하는 그곳으로요. 그때 그 시절과는 다르게 딘은 술 먹고 드러누워 신디에게 섹스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신디는 섹스를 하고 싶지 않아요. 딘이 섹시하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저 상황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섹스의 거부가 얼마나 큰 의미로 느껴지는지 알고 계실 겁니다.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에요. 단순히 섹스를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 존재가 거부되었다는 충격 때문에.
신디의 표정은 그냥 이게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라는 표정입니다. '니가 원하는 게 이거지? 옛다. 한번 대줄게.' 그녀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과 몸짓으로 말합니다. 딘은 그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라며 삽입을 시도하다가 때려치우죠. 나 못하겠어. 이런 식으로는 싫어.
이 끔찍한 섹스씬이 끝나고 나면 감독은 당연한 듯이 그들의 첫 섹스로 관객을 데려갑니다. 아니, 뭐하는 짓입니까? 그런 걸 보고 나면 풋풋한 시절의 딘과 신디가 사랑스러운 섹스를 하는 걸 본다고 해도 즐길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정확하게 감독의 의도대로예요.
감독은 자신이 딘을 너무 엉망으로 표현한 것이 떠올랐는지, 이번엔 딘의 결단을 보여줍니다. 사실 신디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어요. 신디는 고민 끝에 딘에게 그 사실을 말하죠. 딘은 그 이야기를 듣고 혼란스러웠지만, 자신의 의견보다는 그녀의 의견을 묻습니다. 어떻게 하고 싶어? 당신은 어떤 선택을 내릴 거야? 신디는 그 아이를 낳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딘이 그렇게 사랑스럽게 키우는 아이 '프랭키'는 사실 그 시절 자신을 두들겨 팼던 '바비 온타리오'라는 녀석의 아이인 거죠.
신디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가진 것은 딘을 만나기 이전의 이야기였고, 그때 그 나쁜 놈이 사고를 친 것인데 신디를 비난할 수는 없죠. 하지만 그것과 아이를 함께 지키기로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주위에 정말 생각이 '열려'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 물어보세요. 입양한 아이도 아니고, 혼외정사로 가지게 된 아이임을 알고 있으면서 함께 키우기로 마음먹을 수 있냐고. 딘은 이 정도로 신디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신디가 할머니에게 받았던 조언도 '너를 인간으로서 존중해주는 사람을 만나라' 였잖아요? 딘은 자신이 결정을 내리는 대신 신디의 결정을 존중해 줍니다. 아이를 지우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차마 아이를 지울 수 없다고 이야기 했을 때에도. 아마, 신디가 딘을 받아들인 건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대사 한 줄, 한 줄이 사무치게 다가오는 블루 발렌타인의 결말 부분이지만 이 부분은 영화를 보실 분들을 위해서 말을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그냥 영화가 스스로 말하게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이들이 어떻게 끝을 향해 달려가는지, 그리고 아직 신디를 사랑한다 말하는 딘은 어떻게 신디를 잡을 것인지.
딘은 어쩌면 변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회를 잃었다는 것도 알아야죠.
딘은 신디 없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할 겁니다.
그러니, 너무 늦을 때까지 인내를 테스트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 늦은 것이니까요. 차갑게 돌아선 마음에 불을 피우는 건,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니, 불씨가 남아있을 때 최선을 다해야지요.
이 영화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엔딩 크레딧 시퀀스일 것입니다. 쓸쓸하게 프랭키와 신디를 뒤로하고 걸어가는 딘. 화면이 어두워지며 불꽃놀이가 시작됩니다. 드럼의 심벌이 울릴 때마다 하나씩 터지는 불꽃. 그리고 그 불꽃이 비추는 딘과 신디의 아름다운 시절.
이 영화를 연인과 함께 보는 것은 솔직히 조금 말리고도 싶습니다. 너무 우울해지거든요. 기분이 착 가라앉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멋진 신세계>의 '격정 대용약'처럼 사용한다면, 어쩌면 관계에 도움이 될 지도요?
사담이 길었습니다. 어쨌든 기억해주세요. 결혼은 지옥입니다.
함께 지옥으로 걸어 들어갈 소중하고 용감한 연인, 반드시 만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