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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nkhur Sep 03. 2024

싱가포르 여인 (2)

S 는 오랜만에 L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간간이 메신저로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한국과 싱가포르 사이는 마음을 잇기에 너무 먼 거리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L의 전언은 이랬다.


말레이시아 남단에서 싱가포르와 접하고 있는 조호르 주의 동쪽 끝에는 요즘 관광지로 뜨고 있는 데자루뿐 아니라, 대규모 정유공장이 들어서고 있다. 한국의 석유화학기업도 이곳에 진출해서 버젓이 상호를 내걸고 공장을 가동하고 있어서 자연히 한국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건설 중인 정유공장도 한국 업체가 짓고 있어서 지점 개설의 예비 타당성 조사를 목적으로 데자루 주변으로 출장을 왔다는 것이다.


5 년 전에 곧 다시 올 기회가 있을 거라고 했는데, L의 시간관념은 일반의 통념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듯하다. 예의 ‘곧’이 5 년이라면, 만약 ‘얼마 후’라고 했다면 10 년이나 된다는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문득 일주일 내내 쉼 없이 일해야 하는 직업을 떠올리자, S는 문득 남편의 존재가 성가시게 느껴진다. 도무지 못마땅하다.


싱가포르 내 한국인 커뮤니티에는 거의 가볼 시간도 없지만, 연휴를 앞두고 모처럼 만나면 여러 정보를 듣곤 한다.

집에 필리핀 가정부를 두고서 평일에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하고, 주말이면 말레이시아로 넘어가서 골프를 친다는 어느 아주머니가 오롯하다. 족히 40 대 중, 후반으로 보였는데 군살도 하나 없이 몸매가 거의 2,30 대 같이 탄탄하다.

싱가포르 정부에서 가정부도 일요일에는 무조건 쉬도록 법을 개정해서 아예 일요일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긴 밥이나 청소를 해줄 가정부도 없으니 집에 있을 이유도 없을 법하다. 그래서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근사한 곳에 가서 외식을 한단다. 음악회에도 가고 영화도 보러 가고,

어떤 때는 근처 인도네시아의 섬으로 여행을 가기도.


S는 마치 딴 세상 얘기만 같이 들렸다.

S는 커뮤니티에만 다녀오면 괜히 남편에게 트집을 부리고는 했다. 가정부는 그렇다고 치자. 도네시아는 고사하고, 차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말레이시아도 못 가보는 형편을 떠올리자 괜스레 화가 났던 것이다.


내일은 모처럼 게으름도 부릴 수 있는 휴일인데, L은 국경을 넘어서 오라고 한다. 하나밖에 없는 반가운 친구의 부탁이니 천리 길도 멀지 않다.


문득 S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가만히 시간을 거슬러 가보니, 어느덧 싱가포르에서 산 지가 15 년이 넘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지도 않은 아이들이 벌써 대학생이 되었으니, 참 세월도 빠르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고작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되는 JB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니? S는 아무리 달리 생각하려 해도 이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한국에서 비싼 비행기삯을 치르고 6 시간을 넘겨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도착해서, 다시 또 JB까지 가는 사람들도 무수히 많다는데, S에게 말레이시아는 그렇게 머나먼 나라였을까?


S는 고향인 통영을 떠나 왜 이토록 멀고 먼 이국 땅에 정착을 하게 되었는지 스스로도 알 길이 없다.

봄에 언덕바지에서 캐낸 쑥으로 도다리를 넣어 말갛게 끓여낸 도다리쑥국. 늦가을에 갓 김장한 김치에 싸서 먹던 햇굴. 겨울철 친정엄마가 큰맘 먹고 사 와서 칼칼하게 끓인 물메기탕. 서호시장 뒷골목의 팥장국과 우짜. 고향의 음식을 먹어본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친정엄마는 제사 때 꼭 돔, 민어, 가자미, 갈치 따위의 생선을 쪄서 내놓는다. 입에 들어가면 스르르 녹았다. 특히 민어를 반건조상태로 말려서 쪄내면 씹히는 맛은 세상 어느 맛과도 비교할 수조차 없다.


무엇보다 통영비빔밥은 환상적이다. 무나물, 참박나물, 호박나물, 콩나물, 미나리, 도라지, 시금치, 고사리, 부추 등과, 해산물인 미역나물과 두부를 어깨서 버무린 톳나물까지, 자그마치 10 가지가 넘는 나물이 들어간다.

엄마는 얘를 따로따로 일일이 볶아서 가지런하게 그릇에 담아내신다.

밥에다 나물을 죄다 얹고 탕국 속의 해산물을 함께 넣어서 비비면,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비빔밥이 탄생한다. 비빔밥 한 숟갈에 민어를 곁들이는 생각만 해도 건반사처럼 저절로 침이 고인다.


작년에 가족 행사가 있어서 수년 만에 통영을 찾아 실컷 고향음식을 즐겼지만, 15 년 전과는 사뭇 달라서 여기가 내 고향인가 의아했다. 아무려나 고향을 떠올리면 왜 엄마와 음식부터 생각이 날까?


L을 다시 본다는 기쁨도 잠시, S는 갑자기 초조해진다.

택시를 타고 국경을 건널 수 있다는 얘기를 얼핏 듣긴 들었는데, 막상 어디서 어떻게 택시를 타야 하는지, 도착해서 어떻게 육교를 찾아가야 할지, 모든 게 막막하기만 하다. 어릴 때부터 오빠한테서 ‘길치’라고 숱하게 놀림을 받았기에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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