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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nkhur Sep 04. 2024

싱가포르 여인 (3)

L 은 이번 출장에서 옷가지를 많이 챙기지 않았다.


출장기간이 짧은 이유도 있지만, 그간의 경험이 톡톡히 한몫했다. 출장 오면 늘 세탁이 골칫거리다. 호텔에 세탁물을 맡기면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근처 빨래방까지 들고 가서 이른바 셀프세탁을 한 적도 있지만 그것도 귀찮았다. L은 출장올 때마다 세탁에 어려움을 느꼈던 터라 정장 한 벌에 가급적이면 막 입을 수 있는 옷, 없어져도 덜 아까운 옷만 챙겨 오는 습관이 생긴 지 오래다. 좀 해졌으면 두어 번 입고 버린 뒤 새로 사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이를테면, 양말 세탁비가 새로 사는 것보다 비싸니까.


그러고 보면, 레지던스 호텔이 적격이다.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은 뒤 빌트인 식기세척기에 넣기만 하면 되니까. 게다가 세탁기도 있어서 세제만 사면 세탁 걱정도 해결된다.


사계절이 더운 나라인데, 한국에서 고 온 긴소매옷을 입고 S를 만나러 갈 수도 없고, 정장은 더더욱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 후줄근한 옷을 입고 나가자니 L은 못내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오랜만의 해후인데 혹여 나쁜 인상을 심어주지나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몇 벌 안 되지만, 이 옷 저 옷 꺼내도 도무지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


문득 L은 생각한다. 이렇게 겉모습에 신경 쓰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걸까? 어느 70대 할머니의 얘기를 책에선가 인터넷에선가 봤던 기억이 난다.


주말에 손자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올 때면 할머니는 언제나 예쁜 저고리를 꺼내서 입었다. 엷게 화장을 한 뒤 거울 앞에서 참빗으로 곱게 머리도 빗은 후 웃으면서 손자의 친구들을 맞았다. 매번 이런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던 손자가 그만 내뱉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할머니는 왜 제 친구들이 오는 날이면 매번 새 옷도 꺼내 입으시고, 머리도 곱게 빗으세요?’


손자에게 이런 말을 들은 할머니는 물건을 훔치다 들킨 것처럼 당혹스러웠다. 그 뒤로 미소가 사라지시고 겉모습에 신경도 쓰지 않으시다가 결국 얼마 못 넘기고 세상을 하직하셨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타인, 특히 이성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라는 사실을 그 손자는 몰랐던 것이다. 다소 지나친 억측이고 극단에 가까운 에피소드일 수 있다. 손자 친구를 이성으로? 이성을 의식했건 아니건, 누구나 스스로를 가꾸는 일은 때때로 소중한 삶의 의미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L은 그 할머니의 에피소드를 접한 게 불현듯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서로가 반백을 넘어섰지만 S도 이성이란 사실을 상기했다. 자주 보는 사이도 아니고, 또 5년이 지나도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도 없는데,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게 뭐가 잘못이냐고 되뇄다.


한 며칠 운동을 못하고 과식해서 그런지 어느새 뱃살이 두툼하게 잡힌다. L은 과식을 했을 때와 한두 끼를 굶었을 때의 차이가 무려 3kg 이상이 난다. 특이체질인지, 지극히 정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먹은 게 이렇게 많았던 걸까? L은 화들짝 놀라곤 한다.


결국 L은 운동복을 챙겨서 입고 호텔을 나섰다. 얼마 전에 면세점에서 장만한 블루투스 헤드폰을 쓰고서.


데자루 해변으로 난 길은 그야말로 울울창창한 열대우림이었다. 멀리 에메랄드빛으로 휘황한 바다가 보이는 곳도 있다. 나무 밑동도 엄청나게 크고 얼마나 키들이 웃자라 있는지 L은 자신이 왜소해 보이는 기분도 든다. 막상 조깅할 때는 조금만 뛰어도 땀이 주르륵 흘렀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이럴 때는 베토벤 교향곡 7번이 제격이란 걸 L은 익히 안다. 4 악장 내내 연주자들에게 쉴 틈을 안 줄 만큼, 베토벤은 열정이 가득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조깅은 무릇 열정과 닮았다. 힘들다고 잠시라도 쉬면 효과는 크지 않다. 오케스트라의 화음이 깨지듯이, 열정을 잃는 순간, 운동의 효과는 반감한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니 뱃살이 쏙 들어간 기분이 든다. 얼추 1.5 kg 넘게 줄지 않았나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얼굴도 한결 갸름하게 보인다.


S를 만나는 게 이토록 설레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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