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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nkhur Sep 04. 2024

싱가포르 여인 (4)

S 는 결국 딸에게 털어놓았다.

“엄마가 5년 전에 동갑내기 친구 둘을 안다고 했지? 그중에 한 친구가 조호르에 출장 와서 내일 만나기로 했어. 그런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냐.”


S의 딸은 아빠와 말은 섞지 않은 게 5 년은 족히 넘었다. 사춘기에 접어들고는 아빠의 존재를 모른 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빠와 엄마 사이도 마찬가지인 걸 안다.

오빠와 나를 위해 일주일 내내 고생하시는 모습이 매양 애처롭게 보이기만 하는데, 아빠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집에 와도 가족끼리 서로 대화가 없자, 어느 날부터 아빠는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사무실에서 자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엄마가 남자 친구를 만난다니 좋게만 보였다. 한껏 부추기고 싶을 지경이다.


“엄마, JB를 어떻게 갈지 겁나서 그래? 내 친구 미셀 알지? 우리 셋이 같이 JB에 가자. 마침 내일 미셀과 만나기로 했는데, JB에 가자고 하면 걔도 좋아할 거야. 엄마가 친구 만나는 동안 난 미셀과 쇼핑하며 놀고 있으면 되니까.”


S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갑자기 시름이 뚝 사라졌다. 엄마의 남자친구를 이해하다니, 딸이 기특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제야 S는 적이 안심이 된다. 어차피 택시를 탈 테니까 셋이 가도 비용은 똑같을 거고, 미셀과 쇼핑하라고 용돈 좀 쥐어주면 좋아할 테지.


몇 년 전부터 S는 부쩍 몸이 안 좋다는 걸 느껴가던 참이다. 오십견이 온 건지 자주 어깨도 욱신대고. 그동안 쉼 없이 달려왔으니, 한편으로 몸 어디 한 구석에 탈이 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물며 기계도 몇십 년을 사용하면 어딘가 삐거덕거리게 마련이지 않은가.


한국에 갔을 때다. 막내 동생의 애들이 너무 귀여워서 같이 신나게 놀다가 그만 허리가 삐끗한 적이 있었다. 조카는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고 일어났는데, S는 그로부터 한참 고생했다. 나이가 들수록 소위 회복탄력성이 떨어진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다. 요즘은 어디가 아프면 너무 오래간다. 상처도 더디게 아물고. 나이 듦의 증상일 텐고, 이 변화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그래서 시작한 게 출근 전 아침 산행이다. 꾸준히 마라톤도 하고 매주 산행한다는 L의 말을 듣고 필시 자극을 받은 게 틀림없다.

거창하게 산행이라고 표현했지만, 여기서 제일 높은 산인 부킷티마의 해발고도는 고작 163미터가 조금 넘는다. 부킷이 말레이어로 언덕이고 티마가 주석이니까 산이라기보다 '주석 언덕'쯤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로도 조금 높은 언덕일 뿐이다.


20 세기 중순께, 이 언덕에 주석이 생산되어서 중국계 이주민들이 우르르 모여들었고,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하자 그대로 눌러앉았다고 한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땅이었지만, 말레이시아 본토에서는 20% 내외인 중국계의 인구비율이 여기 싱가포르에서는 60%가 넘는다. 몇몇 지명만 말레이어로 돼있을 뿐, 싱가포르는 중국계 일색이라서 그런가, 마치 홍콩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아침마다 산에 오르며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눈으로 바라보는 게 너무 좋기만 하다.  


L이 언젠가 이런 말을 해줬던 기억이 난다. 헤밍웨이는 단문의 매력을 아는 작가라고. 그러면서 『노인과 바다』의 한 구절을 외운다며 알려줬다.


<Every day is a new day. It’s better to be lucky. I would rather be exact. Then when luck comes you are ready.>


"아마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 - 매일매일은 내게 새로운 날이야. 물론 행운을 얻는 게 더 낫지. 난 정확한 게 좋아. 그래야 행운이 찾아왔을 때, 준비가 돼있을 테니까 - 라고."


그러면서 이를 만약 복문으로 썼다면 감흥은 덜했을 거라고 L은 덧붙였다.


L 덕분에 원서를 사서 딸에게 그 문장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지금도 그 문장이 생각나면 그 부분을 펼쳐 읽곤 한다. 좀처럼 잘 외워지지는 않는다. S는 다시 그 구절을 찾았다. L의 말처럼 네 문장으로 구분해서 읽으니까 외려 더 와닿는 것 같기도 하다.


산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S는 하루하루를 새롭게 맞이하는 듯했다. 덩달아 몸도 예전에 비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고. 어깨가 쑤시던 것도 몰라보게 누그러졌다. 5년 만에 L을 만나는 오늘 아침에도 S는 어김없이 산에 올랐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서 하루도 오르지 않으면 허전할

정도다. 산정에 올라서서 살아있다는 사실을 느껴야 온전히 하루를 맞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산에 오르자 햇빛은 변함없이 나무 사이에서 제 존재를 드러낸다. 하지만 어제와는 분명 다른 해이자 빛이다. 문득 S는 매일 새로운 날을 맞는 듯하여 기분이 상쾌해진다. 어쩌면 내게 행운이 깃들라고 바라는 것보다, L이 알려준 대로 매일 새로운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게 훨씬 더 좋게만 느껴진다.


한때는 L의 너무 진지한 구석이 재미도 없고, 아직도 철이 덜 든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보자, 문득 L이 썩 괜찮아 보이기도 한다. 좋은 친구를 둔 듯해서 흐뭇하다. 늘 호기심이 끊이지 않고, 궁금해하던 걸 물을 때는 눈망울이 마치 천진한 아이같이 초롱초롱 빛났다. S는 그런 L의 모습을 접하며 모르는 사이에 은근히 자극을 받았던 사실을 떠올렸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젊을 수 있다고,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으면 여전히 젊다는 것을, 그러면 몸도 저절로 젊어진다는 것을, L은 늘 힘주어 얘기했던 게 기억난다.


이제 네다섯 시간이 지나면 L을 만난다고 생각하자, 비로소 S도 마음 한 곳에 가벼운 떨림이 느껴진다. 이런 감정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새 L도 많이 늙었을 테지. 세월을 그스르는 장수는 없다고 했으니까. S는 또래의 연기자들이 보톡스를 맞으며 나이를 감추려 해도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남은 흔적을 TV에서 종종 목격하곤 한다. 제아무리 가꾸고 보살펴도 나이는 제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늙는다는 사실이 추한 게 아니라 마음이 더 이상 젊지 않은 게 외려 더 추하다. 오드리 헵번이나 숀 코너리, 제레미 아이언스는 나이 든 모습조차 중후하고 아름다웠다.


나무는 수령이 오래될수록 나이테를 자랑스러워하는 듯 듬직한 모습으로 서있다. 어떻게 먹은 나이인데 일부러 감출 필요가 있을까 으스대는 듯도 하다. 가냘픈 나무는 비바람에 꺾일까 늘 걱정인 반면, 나이테를 많이 지닌 나무일수록 바람으로부터 어린 나무를 보호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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