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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nkhur Sep 05. 2024

싱가포르 여인 (5)

L 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열대지방에서 실내온도를 맞추기란 쉽지 않다. 에어컨을 세게 틀면 새벽에 추워서 깬다. 설정온도를 올리고 자면 베갯잇에 흠씬 땀이 배서 깬다. 이래저래 한두 번은 자다가 꼭 깨고 만다. 그래서 출장 오면 늘 피곤한가 보다.


조금은 호들갑스럽게도 보이지만, 유달리 물이 안 좋은 중동으로 출장을 갈 때면, 심지어 샤워기 헤드도 챙겨간다. 물론 고급호텔은 정수처리가 잘 되어있어서 괜찮지만, 오지의 호텔에 묵을 때는 이와 사뭇 다르다. 어떤 데는 여관 수준의 호텔이 하나밖에 없어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잠잘 데가 있는 것도 고마울 뿐.


오지에서는 샤워를 할수록 외려 몸이 더 가려워온다. 세탁을 대충 한 이불 때문인지, 매트리스에 득시글거리는, 소위 베드버그로 불리는 빈대 때문인지, 아니면 정화가 덜 된 물 때문인지.

오지에 갈 때는 궁여지책으로 빈대를 없애준다는 스프레이를 사가기도 하고, 직접 속옷만큼은 빤다든지, 예의 필터가 장착된 샤워기 헤드로 교체해서 샤워하고 꼼꼼히 바디로션을 바른다.


심리적인 안정감인가? 그런 처방을 했더니 그나마 나았다. 아니면, 몸이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했는지도. 하지만, 아무리 시설이 완벽해도 집만큼 편안한 잠자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게 진리인 듯하다.


언젠가 체크아웃을 위해 기다리다가 어느 투숙객과 호텔리어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여기서 하룻밤을 잔 투숙객이 호텔리어에게 물었다.


“어젯밤에 너무 달콤하게 잤어요. 정말 모처럼 말이죠. 사위는 조용하고, 실내의 온도와 습도는 최적이고, 완벽하게 빛이 차단된 방 안은 마치 수면제를 먹은 듯 잠이 스르르 오게 하더군요."


"편히 주무셨다니, 저희가 더 고맙네요."


투숙객은 내처 이어갔다. 할 얘기가 참 많은 모양이다.


"아, 참. 무엇보다 여기 구비된 침대와 베개가 너무 편하고 좋았어요. 적당한 쿠션의 매트리스에다 목과 어깻죽지를 포근히 감싸는 베개는 정말 최고였어요. 그런데 여기에 있는 침대와 베개는 도대체 어디서 살 수 있나요?”


이 투숙객은 불면에 시달리다가 잠시 세상사 시름을 잊고자 혼자 여행 중이었다고도 했다.

그러다가 이 호텔에서 실마리를 찾은 거라고 조금 호들갑을 떨며 말했던 것이다. 그가 찾은 해답 중의 하나가 바로 편안한 침대와 베개였다고. 그러자 호텔리어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희는 주문 제작을 해서 전 세계 체인호텔에 공급합니다. 그래서 일반인은 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손님.”


한때 L도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돈이 많으면 더 좋은 제품도 살 수 있을 테지만.


L은 제아무리 좋은 침대와 베개가 갖춰진 고급호텔의 스위트 룸에서 자더라도 쉬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내일이면 5년 만에 S를 만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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