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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nkhur Sep 06. 2024

싱가포르 여인 (6)

S 는 산에서 내려오자 등 쪽으로 송골송골 땀이 흐르는 듯했다. 얼마 전에 우기도 끝났고 이제 슬슬 더워질 때가 오긴 왔다. 부랴부랴 샤워를 하고, 아침식사로 샌드위치와 우유를 내왔다.


5년 전에 L이 간헐적 단식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서, 일주일에 두 번씩 하루에 한 끼만 먹었던 적이 있었다. 고된 일을 해야 해서 이틀의 단식은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아침을 안 먹는 방법으로 전략을 바꿨다. 나도 모르게 L을 따라 간헐적 단식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가족을 위해 간단하나마 아침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여전히 S의 몫이지만.


우물우물 샌드위치를 먹는 딸에게 몇 시에 어디서 택시를 타는지 재차 묻는다.


“부기스에 가면 J로 시작하는 말레이시아 택시들이 서있어. JB까지 요금이 채 50 불도 안 돼.

10 시쯤 출발하면 입국 심사할 때 좀 기다려도 아마 11 시 이전에는 충분히 JB까지 갈 수 있을 거야. 택시를 타면 버스와 달리 내릴 필요도 없이 차 안에서 입국심사도 하니 엄청 편해.”


JB가 조호르 바루의 준말인 건 알아듣겠다. JB 택시도 J로 시작한다는 것도. 문득 S는 딸이 다 컸다는 생각을 한다.

싱가포르에서 이른바 청춘의 거리라고 불리는 부기스도 가본 지가 오래다. 싱가포르에 살면서도 막상 안 가본 데가 너무 많은 듯하다.


그러고 보니 5년 전이다. L이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에서 출발하여 비치로드 너머 선택시티 부근까지 조깅하면서 공유해 준 사진이 기억난다.

L 덕분에 모처럼 부기스에 내리자, 근처의 비치로드가 중첩됐다. 10년도 더 전의 얘기다.

비치로드에 북한대사관이 있다고 들어서 살짝 겁이 났었다. 그 이후로는 자연스레 발길이 뜸했던 것도 같다. 당시는 북한만 떠올리면 멀리해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이 될 때만 해도 세계가 보수의 늪에 빠지는 듯 암담했다.

아베의 일본도 답답한데, 거기에 더해 미국까지 공화당 정권이라니. 한숨이 절로 났다. 그런데 보수든 진보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적과도 동침하는가 보다. 얼마 전 여기 센토사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할 때는 꽤나 놀랐다. 반미 일색의 북한이 미국과 회담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것도 S가 사는 싱가포르에서 말이다.


새삼스럽게 남과 북은 한민족이란 사실을 상기했다. 예전에 L이 열변을 토하던 기억이 난다.

L은 말이 없다가도 자기가 관심을 갖는 소재가 나오면 아이마냥 어쩔 줄 모른다. 마이크를 내려놓지 않는 노래방 마니아처럼. 그런데 L에게는 그 소재가 너무 많아서 탈이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당시 L은 이런 얘기를 했다.


“신라는 당나라의 도움을 받아 백제와 고구려를 통일한 후에 고구려 유민이 세운 북쪽의 발해와 남북으로 나뉘었지. 그런데 왜 통일신라시대라고 표현할까? 통일신라시대는 마땅히 역사 교과서에서 사라져야 할 용어라고 생각해. 남북국시대가 맞을 거야.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면면이 이어져오다가, 일본에 패망하여 식민지 통치를 받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고, 1945년 해방의 기쁨도 잠시, 둘로 나뉘어 우리는 지난 70여 년간 남북한시대를 살고 있어.

독립은 홀로 선다는 의미인데, 해방 후의 정국은 결코 완전한 독립이라고 할 수가 없다고 봐.

이 나라가, 이 민족이, 타의에 의해 둘로 나뉘었으니까. 아마도 국민당이 축출되고 중국이 공산당으로 통일되는 바람에 미국은 다급했던 것 같아. 결국 이 땅의 분단은 남쪽에라도 정부를 수립하게 해서 한반도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한 미국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 아닐까?”


현재를 통사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며 했던 L의 말이다. 후대의 사가들은 지금을 남북한시대로 부를 것이며, 이 상태도 가까운 시일 내에 끝나서, 고려나 조선처럼 한반도와 그 너머 간도를 포함해 하나의 국가만 존재할 것이라고. 그러니 북한을 적으로만 대하지 말라고, 더는 이념의 대립으로 각을 세워서 바라보지 말라고.


부기스 역에서 딸의 친구 미셀을 만났다. 아직도 영어가 서툰 S는 한국말을 해도 척척 알아듣는 미셀을 좋아한다. 10시가 조금 지나서 JB를 향해 택시가 출발했는데, 우드랜즈 체크포인트까지 정말로 30 분이 채 안 걸렸다. 주말이라서 그런지 체크포인트에 이르는 길 초입부터 오토바이와 차량 행렬이 길게 늘어서있다. 그래도 쑥쑥 줄이 짧아진다.


창이공항 쪽에도 조만간 말레이시아를 잇는 다리가 건설될 계획이라는데, 두 나라 사이를 잇는 다리가 세 개나 되면 말레이시아는 정말 동네 마실 다니는 기분일 듯하다.


다리를 건너자 이번에는 말레이시아 입국심사대가 나온다. 여기서도 차에서 내릴 필요 없이 순식간에 입국 스탬프를 찍어준다. 이윽고 약속장소인 JB 센트랄과 시티몰 사이의 육교 아래에 이르자 택시가 멈춰 섰다.

도착하니 채 11 시가 안 되었다. 이렇게 쉽게 올 줄이야.


센트랄은 ‘Sentral’로 표기가 돼있다. 말레이시아는 영어를 문자로 쓰면서 발음 그대로 글자를 표기해서 생경한 단어가 탄생한 셈이다. 식당은 Restoran, 경찰은 Polis, 커피는 Kopi, 분은 Minit라고 하는 것처럼. 처음에 Sentral 이 무슨 뜻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11시가 조금 지나자 L에게서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10분쯤 후면 도착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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