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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nkhur Sep 06. 2024

싱가포르 여인 (9)

L은 결국 약속시간보다 10분 늦게 도착했다. 5년을 기다렸으니, 10분은 이해해 줄 테지. 아니, 5년 같은 10분이었을까?

혼자다! 딸과 같이 오지 않은 건가?


만나자마자, 내 이름을 부르면서 반가워한다. 다행이다. 용케도 기억해 준 것만으로. 5년 전과 다르지 않단다. 희끗희끗 머리도 세고, 쭈글쭈글 주름도 늘고, 푸석푸석 피부도 많이 거칠어졌을 텐데도. 의례적인 인사치레란 걸 안다. 혹시 얼마 전에 염색한 게 효과를 발휘한 걸까? 눈밑 처짐을 숨기겠다고 밤마다 크림을 바른 때문일까? 부지런히 폴리페놀이 들어간 야채를 챙겨 먹어서일까?


아무려나 자세히 보면, 세월의 흔적을 쉬 발견할 것이다. 감춰도 드러나는, 피할 수 없는, 고단한 생의 무게를.


L은 차마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려 발악했다는 사실을.


"그런데 왜 혼자야?"


S는 곧 딸이 올 거라고 한다. 말하기 무섭게, 사진으로 봤던 귀여운 아가씨가 아이같이 뽀얀 얼굴로 저만치서 걸어오고 있었다. 선뜻 인사를 건넨다. 목소리를 들으니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더 밝고 환하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우리더러 가란다. 이 낯선 곳에 우리만 남겨두고 어디론가 가겠다고? 내심 둘만의 시간을 고대했지만, 바로 헤어지는 건 어른의 도리가 아니다.


“아니에요. 넷이서 같이 점심부터 먹어요. 조금 있으면, 출출할 시간인데. 육교를 건너 내려오다가 보니까 이층에 딤섬이 맛있어 보이는 식당이 있던데 거기로 갈래요? Q 라인에 줄도 긴 것을 보니 아마도 맛집인가 봐요. 그런데 이 친구는 싱가포르 사람이에요?”


의외로 어릴 때 이민 와서 15년 동안 영어, 중국어를 배웠던 아가씨가 한국말도 또박또박 정확하다. 딸을 잘 키운 듯하다.


“네, 저와 중학교 때부터 사귄 가장 친한 친구, 미셀이에요. 미셀은 한국말은 못 해도 엄마와 제가 하는 말은 다 알아 들어요. 신기하게도. 그런데 식사까지는…… ”


함께 식사하기가 머쓱한가 보다. 하긴 낯선 사람과 같이 마주 앉아 밥 먹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대뜸 S가 그 틈새를 이어준다. 능숙한 해결사처럼.


“같이 점심 먹자. 아저씨께서 사주신다고 할 때는 사양하지 말고 따르는 게 좋아. 그래야 돈도 굳지. 안 그래?”


S의 말이 통했는지, 딸은 곁의 미셀과 눈짓으로 대화를 나눈다. 그러더니, 예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같이 점심 먹자고 한다. 미셀은 모든 대화를 이해했다는 듯이 말없이 미소로 답한다.


L이 봐뒀던 딘타이펑 Din Tai Fung이라는 딤섬 레스토랑은 대만에서 전 세계로 진출한 체인점이다. 명동이나 강남역에도 진출했을 정도니 꽤 유명한 곳이다. 물론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만에 가족여행 갔을 때 가장 먼저 딘타이펑 본점을 찾은 게 기억난다. 아마도 JB에서 겪은 좋은 기억 때문일 톄다. 미셀도 중국계라서 그런지 딘타이펑이 싫지 않은 눈치다.


아침을 먹지 않아서 참 많이도 주문했다.

메인이라 할 수 있는 딤섬 종류는 기본이고, 닭고기 튀김이 올려진 볶음밥, 완자탕, 새우탕수육, 굴소스로 볶은 카일란 Kailan이라는 채소 등등.


L만 음식이 입맛에 맞은 게 아니었나 보다. L을 둘러싼 세 여인도 그에 못지않은 왕성한 식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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