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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nkhur Sep 06. 2024

싱가포르 여인 (10)

S 는 딸을 데려온 것도 미안한데 흔쾌히 점심도 대접하겠다는 L의 마음 씀씀이에 무척이나 고마웠다. 간헐적 단식을 한 이후 한 동안 끼니마다 폭식을 한 적이 있어서 S는 음식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곤 한다. 간단하게 딤섬만 먹으려고 했는데, L은 이것저것 많이도 시킨다. 워낙 잘 먹는 친구인 걸 아는데, 딸하고 미셀도 마다하지 않고 주문을 거든다.


하나씩 음식이 도착하는데, 역시 딤섬이 제일 먼저 서빙되어 왔다. L이 딤섬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런데 속 재료의 액체소스가 앞 접시로 흘러내렸다.

그것을 보자 친절하게도 미셀은 딤섬 먹는 법을 설명해 준다. 딤섬을 숟가락에다 올려놓고 살짝 외피를 터뜨려서 먹으라고 한다. 그것도 오랜만에 듣는 유창한 싱글리쉬로.


3,000 년 전 광동 지방에서 처음 먹기 시작했다는 딤섬도 이렇듯 먹는 노하우가 있다는 걸 S도 처음 알았다. 왜 중국식당의 숟가락이 오목하게 파였는지 알 듯도 하다.

미셀이 포트에 담긴 청차를 주문하면서 팁도 하나 알려줬다. 청차가 도착하자 미셀은 예의도 바르게 모두에게 차를 그득 따라주고 나더니 뚜껑을 살짝 열어 놓았다. 그 이유를 딸이 설명해 준다.


“아, 예전에 미셀이 가르쳐줬어요. 이렇게 뚜껑을 살짝 열어 놓으면 지나가던 종업원이 이걸 보고 다시 포트를 되가져가서는 뜨거운 물을 부어준다고 해요.”


L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다. 쉰을 넘긴 남자에게 적절한 표현은 아니겠지만, L은 늘 그랬다. 딱히 눈치를 준 것도 아닌데 대부분의 그릇이 바닥을 보이자, 딸은 이제 그만 일어나자고 말한다. 각자 헤어졌다가 6시에 시티몰 입구에서 다시 보자고 하며.


JB는 처음이라 막상 L과 둘만 남으니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우선 L은 조그만 가방 하나와 티셔츠부터 사자고 한다.

긴소매 옷을 입고 와서 의아했는데, 한국에서 입고 온 옷이 이것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하긴 지금 한국은 아직 꽃샘추위가 찾아오는 겨울이니까.


L의 손에 든 책을 보자 여전히 열심히 사는 모습이 읽혔다. 그런데 한 손에는 책을, 다른 한 손에는 장지갑과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는 담배나 이어폰 따위를 넣은 채 불룩하게 해서 왔으니, 둘러매는 가방 하나는 필요해 보였다.


S라면 오래 걸렸을 텐데, L은 금세 어깨에 메는 가방 하나를 냉큼 고르고, 반팔 티셔츠도 하나 장만했다. 좀더 시간을 내서 천천히 골라도 되는데.


이윽고 모든 게 갖춰진 듯 의기양양하게 L은 말한다.


“관광하러 온 것도 아니고, 시간도 넉넉하지 않고, 너무도 오랜만에 만났으니 우리 커피 마시며 수다나 떨까?”


딱히 갈 데가 마땅치도 않다. 그냥 같이 식사하고 커피 마시며 얘기나 실컷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러자고 했더니 L은 최근에 싱가로프에서도 유명한 그랩을 띄워 차를 호출한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눈앞에 싱가포르가 보이는 페리 항구 부근의 호텔 앞이다. 예전에도 L은 몇 차례 와본 곳인 듯하다. 힘들여 국경을 넘어왔는데, 바로 눈앞에 S가 사는 싱가포르가 보이다니. 한 순간 S는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마음이 한없이 누긋해졌다. 조호르 해협의 잔잔하고 평온한 파도만으로도, 그 푸르른 물색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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