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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nkhur Sep 07. 2024

싱가포르 여인 (11-1)

L 은 JB에 오는 내내 무얼 할까 이리저리 고민했다. 한국에 있는 수많은 모텔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불륜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건 아니다. 늘 혼자인 게 외로워서였을까?

박진표의 입봉작인 <죽어도 좋아>는 일흔을 넘긴 노인의 사랑이야기이다. 이재용의 <죽여주는 여자>도 윤여정의 역인 박카스 할머니를 통해 노인의 욕망을 보여준다. 나이가 들어도 욕망은 수그러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서로 가정이 있고 넘어서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법. 보고파서 애달픈 사이라기보다 그저 함께 있어서 좋은 친구로 만났기에 서로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이 만남의 의미는 충분하다. 엉뚱한 생각은 금물이라고 L은 다그치듯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사실 해외로 출장 가서 기간이 길어지면 더욱 외로운 게 사실이다. 어느새 스멀스멀 욕망이 비집고 나오기도 한다. 이를 상쇄할 목적으로 책도 두세 권 챙겨 오고, DVD 타이틀을 가져오기도 한다. 책은 평소에 읽기 어렵거나 두꺼운 책을 일부러 가져온다. 한 감독의 영화를 섭렵할 때도 있다. 무릇 고독의 극복은 고독의 향유로 가능하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20년 만에 겨우 읽어낸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도 그렇고, 도스토예프스키의『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안인회의 『게르만신화 바그너 히틀러』, 플라톤의 『향연』, 호메로스의『일리아스』 등도 모두 출장지에서 읽지 않았으면 쉽게 소화할 수 없는 책들이다. 외로움이 가져다준 선물인 셈이다.


허우 샤오시엔, 끌로드 샤브롤, 잉마르 베리만, 존 포드 등은 초기작품부터 시대순으로 모두 챙겨봤는데 역시 출장지여서 가능했다.

음악도 몰입해서 듣는 편이다. 이탈리아 교향곡으로도 불리는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을 세 달 내내 아침저녁으로 듣기도 했다. 그 이후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3번, 하는 식으로 집중해서 들을 수 있었던 것도 매일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제대로 고독을 누렸다.

그럼에도 미치도록 외로울 때가 있다. 그리움이 우련히 밀려올 때는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난다. 나이가 들수록 남자는 남성호르몬은 줄고 여성호르몬은 많아져서 눈물이 흔하다는 말을 L은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한 차례 눈물을 쏟고 나면, 굳이 카타르시스를 들먹이지 않아도 감정은 누그러지고 자연히 생각이 깊어지고 그 생각의 끝을 글로써 옮기기도 한다.


욕망은 시도 때도 없이 생기는 외로움의 정서와는 사뭇 다른 면이 있다. 담배에 중독된 사람이라도 피울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신기하게도 담배 생각이 안 나듯이. 10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도 견딜만하다. 욕망도 외부의 요인에 의해 차단되는 상황이면 뜻밖에 수그러드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출장지에서도 마찬가지다.


L이 어느 공장의 재무상태를 조사하려고 방문했을 때다. 아침에 가서 저녁까지 서류를 검토하고 브리핑을 하고 상담까지 하였는데, 하루 내내 담배를 피울 수조차 없었다. 그 공장 내에는 흡연실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도 쉽지가 않다. 외부로 가려면 거리도 멀거니와 일일이 게이트 패스를 보여주며 통과해야 했다. 그럴 때면, 희한하게도 담배 피우고 싶은 욕구가 안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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