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재독 철학자인데 독일의 투명성 있는 사회에 대한 화두가 어떻게 던져지고 있는지는 모른다만, 분명한 건 필자가 '투명사회' 를 만들기 위한 과정과 그 결과물을 결코 긍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는 내가 결코 부인할 수도 고칠 수도 없는 나와 다른 어떤 것을 부정성으로 명명하고 그러한 부정성이 존재해야 사회가 정반합의 변증법성에 의해 올바로 발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투명사회는 사회를 '투명' 하게 만들기 위해 눈에 띄고 거슬리는 모든 것들을 동일하고 긍정적으로 바꾸어 버리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투명사회에 존재하는 개인들은 스스로를 성과주체로 바꾸어 '전시'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전시된 자아는 맥락 없는 포르노처럼 소비되는데, 전시를 위해서는 매끄러운 아름다움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자아는 자기착취를 통해 부정성이 되는 굴곡을 없애려 애쓴다. 투명사회는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디지털 파놉티콘panopticon 과 같은데 그 속의 개인들은 자발성이라는 이름 하에 스스럼없이 자신을 노출하고 전시하면서 자신의 자유와 통제를 동일시시킨다.
이전에 읽은 책과 논지는 비슷하다. 필자의 사상이 집약된 개론을 읽고 각론을 읽은 기분. 반복되는 핵심 논지는 "투명사회는 곧 시스템에 의한 감시사회다, 부정성(다름, 차이)이 제거된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라는 것.
<폭력의 위상학> 및 <투명사회> 를 비록 필자의 국내 번역된 도서 중 여섯 권을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김태환 교수님이 번역하셨네. 역자 해설도 풍부하고 해설을 읽음으로써 이해가 안 되던 부분이 해소되기도 하는지라, 읽기 전 가이드로써 읽고 본문에 진입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