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외부 표출이 곧 권력이었던 고대 원시 사회. 국가의 성립 이후 형벌 시스템의 형성에 따라 이러한 폭력은 곧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죄악시된다. 시스템은 곧 감시자인 권력자의 힘이 되는데 전근대사회 및 규율사회에서 시스템은 감시자로서 기능하며 개인은 이러한 대타자를 내면화하여 스스로 초자아의 복종주체가 된다. 그러나 규율사회까지만 해도 부정성(다름)으로서 존재했던 대타자는 후기근대사회에 들어서 이상주체로 변모한다. 규율사회의 복종주체는 후기근대사회에선 성과주체가 되어 이상주체가 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기획하고 예속시킨다. 문제는 이 과정이 자기착취를 기반으로 하나 성과주체 자신은 스스로가 자유롭다 착각한다는 점이다. 폭력은 이제 외부에서 내부로 위상이 이동된다.
자기착취를 기반으로 한 굴레 속에서 자아를 빼내려면 타자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려면 나와 다른 존재인 타자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 즉 우의 혹은 부정성의 긍정이 필요하다. 타자의 의지를 박살 내버리는 폭력과 달리 권력은 타자의 의지를 마치 일반의지인 것처럼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만드는데, '규범'을 받아들인 개인은 그 기저의 시스템을 일상처럼 받아들이고 내면화시킨다. 긍정성의 과잉이라는 측면에서 리좀의 폭력 장이 재미있었는데 끝없는 '또 ··· 또 ··· 또 ···' 의 양산으로 공허한 쓰레기 더미가 생성된다는 말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2023년 1월을 맞이하여 읽기로 한 책, 다행히 1월이 다 가기 전에 완독했다. 지독하게 어렵고 불친절한 책이었고, 읽는 내내 밀도 있게 꾹꾹 눌러 담긴 한 문장 한 문장의 깊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내 잘못인지, 번역의 문제인지를 생각해보곤 했다. 그럼에도 개념적 사유와 도구어를 되새겨주었다는 점에서 곱씹을 만하다. 저자가 말하는 성과주체인 나는 자기착취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분명한 건, 알면서도 이 쳇바퀴에서 내려가기가 더 두렵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