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사람이 있다. 어두컴컴한 묘지에서 죽은 아이의 시신이 묻힌 묘지 앞에서 상념에 잠긴 한 사람이 있다. 대의를 위해 아들의 죽어가는 순간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으나, 그럼에도 자신이 짊어질 나라의 미래-형체는 과거와 같아서는 안 되기에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는 사람이다.
조지 손더스의 <바르도의 링컨(Lincoln in the Bardo)> 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이승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어쩌면 자신들이 죽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바르도Bardo 라는 연옥과 같은 공간에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바르도에 에이브러험 링컨의 어린 아들 윌리 링컨이 오면서, 어린아이를 바르도에서 떠나게 해 주려는 귀신들의 노력 속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 이야기에는 전지적인 내레이터의 존재가 없다. 현실을 묘사할 때도, 바르도를 묘사할 때도. 현실 세계를 묘사하고 설명할 때는 무수한 레퍼런스의 인용을 통해 한 사건과 한 인물을 둘러싼 이해관계를 살피고자 한다. 바르도에서는 무수한 입들이 각자의 입장에서의 이야기를 펼친다. 현실 세계와 구분되는 바르도는 모두가 '동등한' 발언권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그곳은 흑인, 여성, 동성애자에 대한 무분별한 차별이 가해지는 19세기 프로테스탄티즘적 교리와 관습이 지배하는 현실의 연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바르도에서 <민주적 평등> 이 이루어지려면 현실에서의 민주적 평등이 선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바르도의 링컨, 표면상으로는 바르도에 도달한 윌리 링컨과 그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품 속 에이브러험 링컨은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킨 이후에야 대의와 이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가의 자식들을 희생시킨 대가가 얼마나 큰지 깨닫는다. 국가의 호명 아래 귀중한 삶과 청춘을 바르도로 내던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목소리들, 억압적인 사회에서 짓밟혀 개인적 자유를 위한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존재들. 이 작품은 그런 존재들의 목소리로 말미암아 '국민의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부를 약속하겠노라 속삭이며 현실의 희생을 요구하는 위정자들에게 과연 당신들은 약속대로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대변하고 있는지를 묻는 듯한 작품이다. 물론 에이브러험 링컨 개인의 고뇌와 더불어.
개인적으로는 어린 신부와의 첫날밤을 두고 차에 차여 죽은 이의 아이러니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이루지 못한 그 첫날밤이 한스러웠는지 내내 그 기억으로 바르도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내내 그녀에게 새 인생을 주었다, 우리의 관계는 억압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호언장담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어린 신부는 그가 죽음으로써 자유로운 새 삶을 얻을 수 있었다.
작품의 소개글처럼 말 그대로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전지적 내레이터 없이 대화로만 이루어지는 전개 속, 그럼에도 각 인물들이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안타까워하는지, 무엇을 깨닫는지를 알고자 하며 따라갔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