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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Jun 05. 2023

인간은 그렇게 영원한 메시아 찾기의 여정을 계속한다

책 <연기 인간>, 알도 팔라체스키 저


이탈리아 환상문학 중 하나라는 <연기 인간>. 이탈로 칼비노의 작품을 재밌게 읽은 적이 있기에 기대를 품고 읽게 됐다. 물론 앞서 인스타에 포스팅했듯 비유를 이해하기가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연기 인간은 33년간 어두운 굴뚝 속에 존재하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존재다. 그는 세상 속으로 나오기 전 페나(pena, ‘고통’), 레테(rete, ‘그물’), 라마(lama, ‘창’)와 함께 있었다. 그들 각각은 연기 인간에게 "마음의 고통을 낱낱이 말하기도 하고, 그 마음을 포획한 그물을 낱낱이 말하기도 하고, 그 마음을 꿰뚫을 창을 손에 쥐기도" 했다. 그들은 빛이 있기 전 검은 세상에 웅크리고 있던 연기 인간에게 전쟁과 사랑과 철학으로 얽힌 인간사에 관해 이야기했다.


연기 인간은 그들 셋의 이름을 따 사람들이 자신을 ‘페렐라’ 라고 부르도록 한다. 그는 아주 <가벼운> 존재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증명을 요구받을 때마다 "나는 아주 가벼워요." 라는 말로 답한다. 그리고 그 가벼움은 쇠와 납과 강철로 이루어진 인간 사회와 대조된다.


탑과 건축물로 이루어진 지붕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하늘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온몸을 휘감는 강철 전투복과 휘황찬란한 보석들은 인간과 사물을 제도와 관습이라는 세속의 땅에서 발을 떼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권력은 자본과 결합하고, 무능한 왕은 초자연적인 연기 인간의 권위를 빌려 왕국을 통치할 법전을 만들고자 한다. 군중은 페렐라를 세상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한 인물로 떠받들었다가 마녀사냥의 희생물로 진흙 속에 처박기도 한다.


이야기는 제도와 관습의 중심뿐만 아니라 주류에서 벗어난 이들의 이야기도 전한다. 특히 당대 여성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억압과 고통과 슬픔을 여성 본인들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더불어 제도와 관습의 정점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왕자가 자신이 원해서 정신병동에 돈과 마음을 쏟아붓는 모습, 세상 사람들이 아닌 정신병동 속 사람들이 '정상' 이라 이야기하는 모습 또한 주목할 만하다.


작품 초반 추앙받던 연기 인간은 작품의 말미에선 인간 사회에서 추방당한다. 사람들은 그가 늘 신고 있던 장화를 통해 그의 존재가 지금 여기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나, 이제 페렐라는 하늘의 한줄기 빛과 함께 현세에서 영영 사라진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기독교 역사의 알레고리를 암시하듯, 페렐라를 현세에서 쫓아낸 사람들은 그 빛을 보고 또다시 “페렐라를 찾으러 간다” 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은 그렇게 영원한 메시아 찾기의 여정을 계속한다.


원제가 <페렐라의 법전> 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연기 인간이라는 제목도 마음에 들지만, 원제 그대로였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 아닌 페렐라가 가장 인간적인 법전을 만든다는 의미도 되겠고, 고통, 그물, 창으로 엮일 수밖에 없는 전쟁과 사랑과 철학의 결과물인 법전이라는 의미에서도. 뭐가 됐든 완독 해서 뿌듯한 작품이었고 역자인 박상진 교수님의 섬세한 어휘 선택과 문장 구성에 내내 감탄이 나오던 작품이었다. 최근 읽고 있는 언어의 무게에서 번역이란 작가의 세계를 번역자의 언어를 통해 번역자의 세계에 소개하는 말이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 말을 그대로 절감하는 계기였다.


발췌

[...]  페나! 레테! 라마! 이 장화를 신고 땅 위를 걸어 다니라고 당신들이 내게 주었지요, 그렇지요? 어쩌면 장화 밑창이 다 닳을 때까지 걸어 다녀야 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오늘처럼 나를 걸어 다니게 했더라면, 이 장화 밑창은 다 닳아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늘 마차로 이동하게 해 줬기 때문에 장화는 아직 상태도 좋고 훌륭하고 빛이 나며, 밑창도 전혀 닳지 않았습니다. 장화는 내가 가지고 있는, 당신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물건입니다. 오, 인간들이여, 장화는 나를 당신들과 연결해 줬습니다. 이제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기는지 알게 될 겁니다. 나는 이 장화 한 켤레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을 여기 남깁니다.


[...]  페렐라를 찾으러 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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