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벽에 완독 하고 너무 벅차서 하루 내내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오후에 작가님이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작품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세상과 담을 쌓은 채 문두스Mundus 라는 별명 하에 고전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낙으로 살던 그레고리우스. 어느 날 그는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한 여자의 자살 시도, 구해내었으나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진 여성의 자취를 쫓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으로 향한다. 그리고 우연히 아마데우라는 한 포르투갈 귀족 의사의 일기에 매료되어 그의 삶의 흔적을 쫓아가기 시작한다.
내 인생을 투자하여 나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산 이의 궤적을 따라간다는 것은 일견 시간 낭비처럼 보이나, 어쩌면 그 삶을 거울삼아 내 인생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나 마찬가지다. 사실 그는 고전 속 라틴어 문장들이 "침묵을 품고 있으며 대답하라고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고전을 사랑했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고전 속 인물들의 <자기 삶을 사는 것> 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이제 동시대의 그러한 인물, 어쩌면 자신의 이상적 자아와 다름없는 어느 포르투갈 귀족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 영웅의 부서질 듯 여린 내면과 자기 삶을 반추하게 된다.
리스본에 도착 후 망가진 안경을 고치는 과정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새로운 삶이 확장되는 경험을 한다. 중립국 스위스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로 살았던 그레고리우스. 누군가에겐 삶을 내걸어야 하는 혁명의 <현실> 이 그에게는 책 속 삶처럼 현실과 유리된 파편화된 <장면> 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중립국인 베른을 떠나 리스본으로 온다는 것, 그리고 안경을 고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알아온 낯익은 "문법" 세계에서의 탈피, 새로운 그러나 현존하는 "말하면서 배워야 하는" 세계로의 진입이나 마찬가지였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
독재, 폭력, 침묵, 그리고 여행
그레고리우스가 '읽고' 아마데우가 '살았던' 리스본은 2차 대전 이후 독재에 맞섰던 정치적 혁명이 일었던 한 서구 유럽 도시의 상징이었다. 아마데우는 비록 의사로서였지만 "리스본의 인간백정을 살렸다" 는 이유로 공동체의 비판에 직면하면서 저항운동에 가담하겠다고 각성하게 된다.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인간 백정을 구한 죄, 독재 정권 하에 활동했던 판사의 아들이라는 그의 신분은 어쩌면 반드시 저항운동에 참여해 자신을 정당화해야 할 필연적 이유였을지 모른다.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예레미야 23:24)
그런데 타인의 시선이 왜 그로 하여금 생을 걸 위험한 저항운동에 뛰어들 근거가 되는가? 귀족이어도 현실 정치와 유리될 수 없음을 깨달아서인가? 어쩌면 이는 그의 성장 배경에서부터 짚어봐야 할 점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가 겪어 온 현실 속 독재는 외부 세계의 독재만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성장하는 내내 집안 내 미시적 독재에 억눌리고 있었다. 신뢰와 인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옥죄는 사랑을 전하는 어머니, 평생 숨이 막힐 만큼 일방적으로 고마움을 표하는 동생, 그리고 독재 정권 하의 판사였던 아버지의 침묵. 아마데우는 아버지가 말한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 라는 말에 진저리 치면서도, 이를 영혼에 각인시킨다. 그는 단 한 번도 집안에서 자신의 속내를 속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언제나 침묵을 지켰지만, 침묵에 싸인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쪽의 침묵이 다른 쪽의 침묵을 불러온다는 사실 또한 깨닫지 못했다.
불안정하고 민감한 그에게 에스테파니아의 존재는 그녀가 지각하던 대로 "법정 바깥으로, 자유롭고 활기찬 인생의 장소로 나갈 수 있는 기회, 오로지 그의 의지와 열정대로 살 기회" 나 마찬가지였다. 아마데우는 그녀와 함께 리스본을 떠나면서, 자신을 억누르던 그 모든 압제와 요구와 금기를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에스테파니아는 이것은 오로지 아마데우 혼자만의 여행일 뿐, 에스테파니아 자신과 '함께' 하는 여행은 될 수 없음을, 자신은 아마데우가 이루고자 하는 삶의 해방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없음을, 더불어 아마데우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것 또한 일종의 관계적 폭력임을 인지시키며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우리는 과연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하며,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 멜로디를 주는 경험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사실 이는 나조차 나라는 존재의
일부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살면서 나라는 존재의
일부만을 알 수 있다면,
나머지 '내 삶' 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작품에서 계속적으로 은유되는 열차는 내릴 수도 없고, 궤도와 방향도 목적지도 알 수 없는 삶 그 자체로서의 공간이다. 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 그 속에서 서로를 알아볼 시간도 없는 사람들은 그저 덧없는 시선을 주고받을 뿐이다. 그러나 기차 '속' 사람들은 자신의 기차를 꾸려나가면서도 이따금 자신의 칸에 들어오는 낯선 이들의 존재에 환기되기도 한다.
문득 문두스(Mundus, 세계·우주·하늘)라 불리던 그가 나타나고서야 내면의 고통에 침잠했던 아마데우의 아픔이 이해 받을 수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아드리아나의 말대로 그레고리우스는 그를(사실 그의 죽음을) 영원의 시간 속에 봉인한 것과 동시에, 그가 곧 살아 돌아온 아마데우 그 자체였으니까.
아마데우에게 리스본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속박과 금기를 상징하면서도 자신의 현실이자, 떠나면 향수병을 일으키는 곳이었고, 그레고리우스에게 리스본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실망시키는 것들을 추적하고 수집하여, 진짜 삶을 따라가야 한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 솔직한 삶을 위해서는 <아마데우의 리스본> 을 떠나면서 <그레고리우스의 리스본> 으로 향할 용기와 강인함이 필요하다.
목적지 없이 끝없이 달리는 밤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마주하고, 마주해야 하는가. 목적과 방향을 정할 수 없는 열차는 불확실한 삶과 같지만, 터널을 뚫고 맞이한 밤의 끝자락에는 빛과 내일이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침묵으로 가득 찬 고전 문법서가 아닌 말하기 위해 말을 배워야 한다는 걸 깨달은 자의 이야기.
저항의 물결로 가득찬 외부 세계와의 조우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내면 속 침묵이라는 억압을 깨고 해방을 맞이했던 자의 이야기.
그리고,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저항의 목소리를 높여 밤의 침묵을 깨고자 했던 이들의 이야기.
어두운 시대 속 부모의 권위에, 시대의 독재에, 자신의 내면에 짓눌려 침묵하던 이들이 언어를 찾고자 하는 투쟁. 그것이 고전이라는 자기만의 성에 갇혀 있던 이방인의 시각과 맞물려 서술되어 그 이방인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어주는 이야기.
리스본행 야간열차.
발췌
[...]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스치며 지나가는 밤의 만남처럼 언제나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추측과 생각의 단상과 날조된 특성들만 우리에게 남겨두는 건 아닌지. 만나는 게 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이 던지는 그림자들은 아닌지.
[...]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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