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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Aug 02. 2023

기어이 돌아본 소금기둥의 눈물의 회고

책 <제5도살장>, 커트 보니것 저


완독 한 지는 꽤 되었는데 그래픽 노블도 함께 정리하고 싶어서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고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모든 감정과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느냐 한다면 그건 아니고, 읽으면서 붙였던 포스트잇을 정리하여 기록하고자 한다.


기독교적 색채가 강하게 묻어 있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교인을 위한 책이냐 하면 그건 아니고, 서구 역사를 지배하던 신과 이성의 이름으로 자행되어 온 폭력을 온몸으로 목격한 한 개인의 실존주의적 기록인 셈이다. 주인공 빌리 필그림(Billy Pilgrim, William Pilgrim), 본디 예로부터 William 은 윌리엄, 빌헬름 등 서구 역사에서 강인한 의지를 가진 전사와 같은 정복자 왕들에게 많이 붙이던 이름이었다. 작품은 이름과 대비되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인물을 통해 이성을 근간으로 한 인류 문명을 초토화시킨 '세계 대전' 이라는 야만을 목격한 개인이 <강인한 의지> 를 가지고 이성 혹은 절대자라는 진리를 향한 <순례자(Pilgrim)> 의 길을 떠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프로파간다와 더불어 미래의 안위를 약속하며 현실의 희생을 요구하는 위정자들은 대의와 이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가의 자식들을 희생시켰고, 그것은 "유년의 끄트머리, 어린 숫총각들" 과 같은 소년 십자군들을 앞세운, 피와 눈물로 얼룩진 야만의 역사였다. 전쟁 후에도 제도권 교육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구별되는 차이가 없으며, 이 세상에 '악당' 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주입하나 작품 속 인물은 현실과 그 말의 괴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전쟁은 끝났으나, 승전국과 패전국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고, "설사 전쟁이 빙하처럼 계속 오지는 않는다 해도, 평범하고 오래된 죽음은 계속 존재할 것" 이라는 트라우마를 남긴다. 생명을 주고 생명을 유지시켜 준 어머니와 같은 절대자에 대한 불신이 싹트고, <이제 우리는 어디서 왔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라는 실존적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전쟁 후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풀려난다>. 작품에 따르면, 인간은 본디 호박에 갇힌 벌레처럼 순간의 사건을 위해 구조화된 시간 속에 갇힌 존재로, 그는 과거, 현재, 미래를 바꿀 수 없다. 시간에서 풀려난 빌리 필그림은 파편화, 그러나 고정된 시간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현재에서 미래로, 미래에서 과거로, 다시 과거에서 현재로 오간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 속 트라팔마도어인적 시간관과 반자의적 시간여행은 개인 빌리 필그림이 겪은 전쟁이라는 거대 담론적 폭력의 여파이자, 그 자체로 진행되고 있는 폭력과도 다름없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온전한 우리만의 시간 - 과거, 현재, 미래 - 을 가질 수 있는가. 우리는 포드와 디즈니로 상징되는 자본이 재현하는 방식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자본이 재현하는 방식으로 미래를 예측하며 과거의 고통을 망각한다. 20달러짜리 잎, 국채라는 꽃, 다이아라는 열매로 이루어진 돈나무는 그 매력적인 속성으로 인간을 꾀어내나, 그렇게 꾀어낸 인간을 자신의 뿌리 주변에서 서로 죽이게 만들고는 그들의 피를 거름 삼아 자란다. 재갈에 입이 찢겨 피가 흐르는, 발굽이 깨져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는 것이 고통인 타인의 아픔은 내 밥벌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끄집어내어서는 안 될> 어떤 것, <돌아보지 않아야 할> 무언가가 된다.


책이 너무 짧고 뒤죽박죽이고 거슬리네요, 샘. 대학살에 관해서는 지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이지요. 원래 모두가 죽었어야 하는 거고, 어떤 말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거고, 다시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야 하는 거지요. 원래 대학살 뒤에는 모든 것이 아주 고요해야 하는 거고, 실제로도 늘 그렇습니다. 새만 빼면. 그런데 새는 뭐라고 할까요? 대학살에 관해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지지배배뱃? 같은 것뿐입니다.


실제 반전운동의 상징과도 같았던 작품은 작품 밖 이들에게 말을 건다. 들어보라 ㅡ 우리가 모른 척 묵시해 온 아픔은 정말로 끄집어내어서는 안 될, 돌아보지 않아야 할 그 무엇인 게 맞는가.


작품은 어쩌면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산다는 이유로 그 어떤 비판의식도 없이 과거의 아픔에 눈감는 이들을 목격한 "기어이 돌아본" 한 소금 기둥의 회고, 시간에서 풀려난 그 모든 것들을 애도하는 한 인간의 눈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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