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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Aug 14. 2023

타자성을 향한 웃음의 폭력성

책 <프닌(Pnin)>,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저


기차 속 한 남자가 있다. 잘못된 기차를 탄지도 모른 채, 오래된 시간표를 쥐고 가진 것을 잃어버리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매사에 경계 태세를 보이는 남자. 별난 행동을 일삼으며 다른 사람의 조롱 섞인 웃음을 유발하는 남자, 프닌Pnin. 말했듯 그는 <오래된 시간표> 를 쥐고 <잘못된 기차> 를 탔으나, 알 수 없는 행선지로 가는 삶의 여정 속 그의 옆자리에는 <그 누구도> 앉지 않는다.


그는 미국의 한 대학에서 러시아어 강의를 한다. 「 안나 카라마조프 」 라 일컬으며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에 대해 아는 척은 하고 싶지만, 정말로 그 면면의 가치를 존중해 줄 생각은 없는 위선적인 이들로 이루어진 대학.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파스퇴르로 상징되는 서구 문명과 지성의 금자탑을 상징하는 대학. 자신들이 구사하고 재현하는 것들이 기준이자 규범이라 이야기하는 대학은 "기괴한 형체의 배우지 못한 농민들" 을 계몽시키고자 하는 역할을 자처하나, 그 '선한' 의식 아래에 내재하는 선민의식과 같은 폭력성은 너무도 은밀해서 누구도 그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듯하다.


미국 시민인 프닌은 이민자다. 그는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사랑하는 조국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했다. 렌즈가 필요하고 신경증을 유발할 만큼 너무도 예측불허와 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기 위해 도착한 신세계. 레닌주의와 나치즘으로 상징되는 역사라는 거대 폭력은 한 개인의 삶을 짓밟았고, 그 가해성은 구세계와 다를 거라 믿었던 신세계에서도 이어진다. 미국은 역사의 폭력 앞에서 존재 자체로 누더기가 된 그를 포용하기는커녕 그의 '다름' 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그 속에서 프닌의 의식과 영혼이 겪은 고통은 언어로 발현된다. 그는 비록 영어라는 언어를, 그리고 언어로 재현되는 새로운 사회의 규범적 질서를 습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신세계는 <미국인인 척 하지마> 라는 말과 함께 그의 망가진broken 언어가 곧 그의 세계 자체라며 그가 아는 구세계의 지식을 조롱한다.


PNIN is PAIN



가해가 곧 규범인 사회는 <우리와 다른> 존재를 소외시키고 조롱하나, 그 무엇도 프닌의 조국을 향한 애정 어린 향수를 온전히 대변할 순 없다. 그는 프로파간다적 선전 영화를 보며 조국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터뜨리지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자신이 소중히 간직해 온 '구세계' 의 조각들을 꺼내며 웃음 짓는다. 비록 과거로 돌아갈 길은 잃었으나 그는 언제든 <잘못된 기차에서 내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분투한다.


이야기는 한 내레이터가 프닌을 관찰하는 시선으로 이루어진다. 프닌의 이민자성을 요목조목 짚어가며 조롱하는 내레이터. 작품은 마치 '이 신세계에서 <이상한> 네가 해피엔드를 맞이하길 바라지 않으니 네 파탄이 계속되면 좋겠어' 라는 은밀한 속삭임을 까발리듯 내레이터의 존재를 밝히며, 동시에 그와 동일시했던 독자의 위선적 방관을 가리킨다. 말로 한 인간의 삶을 짓밟고 조롱하는 것을 누구보다 즐기던 가학적인 내레이터는 그 조롱을 방관하던 독자로, 사회 전체로 확장된다.


이 작품은 '나보코프의 모든 소설 가운데 가장 코믹하고 가장 애달프고 가장 단순한 소설' 이라 지칭된다. 그러나 1장을 읽는 순간부터 화자의 조롱적 어조가 역겨웠고 프닌의 삶을 보며 "웃기다" 고 하는 게 맞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사회화된 인간은 규범 속에서 무엇을 웃음, 더 나아가 조롱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를 학습한다. 그것은 언제나 주류의 시각을 내포하며 조롱의 폭력은 언제나 타자성을 향해 꽂힌다. 웃음은 폭력이다.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독자가 내레이터(규범)의 시선에 길들여졌던 자신을 의식하고 당황할 순간을 위해 다시 한번 그의 삶을 돌아볼 루프loop 와 같은 장치를 마련하며, 작품 밖 독자에게 되묻는다. 사상적 통일을 요구하는 전체주의적 야만은 비단 구세계만의 일인지. 정치적 숙청과 홀로코스트라는 거대담론적 이야기가 결국 소외와 배제라는 미시적 폭력의 원리로 돌아간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자전적 소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Pain 을 위하여.


프닌PNIN.


문학과지성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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