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는 단지 인류의 상상력을 뽐낼 공상에 불과한가. 인류는 SF를 매개로 태양계 너머 우주로의 도약을 꿈꾸기도 하고 바다 속 깊은 심해 세계를 그려보기도 한다. 인간은 비현실의 세계를 유랑하며 현실도피를 하고자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공상으로의 도피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어떤 역설이다. 그러한 역설과의 조우 속에 우리는 현실 속 모순을 의식하고 의문을 제기하며 혁명적 상상력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이번 <마니에르 드 부아르> 12호는 그런 일련의 상상력의 단초가 될 수 있는 현실 속 위기와 모순, 그리고 그에 대한 사유를 제시한다.
지구상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으나 오늘날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헨리 포드의 변질된 이상에 의해 노동자와 기업가의 구분은 공고해지고, 자본의 위치는 갈수록 견고한 상부 구조에 위치하게 된다. 능력주의를 기반으로 한 지식인 엘리트들은 상위 1% 의 기업가들을 보좌하기 위한 계층으로 공고화된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유도하기 위한 자동화 시스템 구축을 위해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을 수치화하며, 이렇게 수치화된 인간은 별 볼 일 없는 세계의 껍데기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 기업은 은밀한 계획 하에 우리 삶을 좌지우지할 메타 상부 구조를 제작하고, 현실 속 '별 볼 일 없는 삶' 을 가상의 '별 볼 일 없는 삶' 으로 확장할 것을 유도한다. <1984> 의 텔레스크린은 페이스북의 메타가 되고, 빅 브라더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가 이루어지는 SNS가 된다. 욕망을 표현하고자 만들었던 아바타는 되려 나를 옥죄게 된다. 이러한 모순적인 삶 속에서 불만을 품은 인류는 현 체제를 전복시키고 혁명을 일으키고자 또 다른 신세계를 꿈꾸며, 그 일환 중 하나가 우주 탐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여행은 단순히 인류의 발자취를 늘려가는 낙관적 희망에 불과한가. 우주 산업은 미래를 위한 첨단 과학 기술의 상징이나 오바마 정부는 그 엄청난 천문학적 자본을 현실을 살고 있는 지구인들에게 쏟는 게 어떠하느냐는 비판에 응했던 듯하다. 나사NASA 에 대한 정부 예산은 감축되고 그 자리는 일론 머스크를 위시한 기업가들이 잠식하기 시작한다. 러시아에서도 푸틴을 중심으로 옛 소련 시절 우주 강국의 이미지를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는데, 흥미롭게도 이 과정에서 러시아인이 곧 우주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강조되고 그렇게 형성된 정체성을 신성화하려는 움직임까지 생긴다. 이에 따라 우주 산업은 냉전 시대의 두 축이었던 두 나라에 의해 한편으로는 철저한 기업자본주의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갖은 노력을 들여 일구어낼 우주는 인류에게 어떤 영역이 될 것인가. 단순히 인류의 새로운 삶의 터전의 연장인 것인가. 근대 이전 구세계의 족쇄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하던 신세계는 이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지구 밖 공간으로 확장되나, 이는 제국주의적 식민지 확장의 은유와 다를 바 없다. 인류에게는 감히 그럴 자격이 있기나 한 것인가.
과학 기술의 발전과 동행되는 AI(인공지능)는 비非 인류와의 소통 문제에 대한 고뇌와 더불어 인류로 하여금 끝없이 로봇과 자신 간의 구별 짓기를 유도한다. 가상의 아바타와 수치로 상징되는 호모 사피엔스와 달리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존재가 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이제 인류는 과연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무엇이 인간인가. 인간을 다른 존재와 구별할 무언가를 찾는 것이 타당하긴 한 것인가. 분명한 것은 죽음이 예정된 호모 사피엔스의 삶 속에서 성배와 같은 과학이 양면의 거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불안을 극복할 상상력에서 기인한 기술 문명의 발전은 우리를 공동의 꿈의 영역으로도 삶을 테러하는 과학으로도 이끌 수 있다. 그 상상력의 끝에서 우리는 삶의 영원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 수많은 저자의 사유들은 역설적으로 아편과도 같은 SF라는 내일의 메시아를 통해 감각을 예리하게 단련하여 현실 속 수많은 타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되돌아봐야 하는 것이 아닌지 되묻는 듯하다.
르몽드코리아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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