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의 죽음, 그리고 장례식에 그녀의 전 연인들이 모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표면상으로도 복잡다단한 이야기는 각자의 시각에서 죽은 전 연인 '몰리 레인' 에 관한 (파편적) 회고를 내놓으며 전개된다.
몰리 레인의 전 연인들은 각각 예술가 클라이브, 진보 언론인 버넌, 보수 정치인 가마니이며, 출판 재벌인 남편 조지는 몰리의 장례식에 세 사람이 모인 것을 마땅찮아한다.
우선 클라이브는 어려서부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고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예술가이다. 몰리의 20대 청춘을 쥐었던 그는 현실과 유리된 모더니즘 예술의 화신으로 늘 몽상 속에 사는 듯하다. 그는 현실과 자신을 구별 짓고 사회의 고통을 방관하는 예술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그의 방관적 태도는 악상을 떠올린다는 핑계로 범죄 현장을 모른 척하는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더 저지The Judge 의 편집국장 버넌은 "전후의 사회복지국가에서 태어나 나라가 주는 젖과 꿀을 먹고 자라고, 부모들이 이룬 소박한 부에 얹혀살다가 곧장 완전고용의 시대에 돌입한 세대" 의 일원이다. 그는 스스로 진보주의자를 참칭 하며 보수 정치인 가머니를 상대로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모든 상황을 판단하는 위치에 서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무기로 가머니의 사생활을 정치적으로 공격하여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우고자 하지만, 실상 황색 언론의 중심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이윤 추구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그러한 결정' 이 옳은가에 관해 클라이브와 빚게 되는 갈등이 이야기를 파국으로 이끌 단초가 된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기반으로 강력한 이민 규제 법안 등을 내세우는 보수 정치인 가머니는 몰리와 내연 관계에 있던 인물로, 대중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이념과는 반대되는 은밀한 사생활을 지니고 있다. 그는 왜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자 했을까. 어쩌면 자신의 삶과 정체성보다는 탈진실적인 정치적 이득, 더 근본적으로는 그것에서 얻을 경제적 이득을 더 우선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출판 재벌인 몰리의 남편 조지는 사실상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장악한 자본의 상징과도 다름없다. 황색 언론과 "머저리들" 의 주머니를 털어 부를 이룩한 조지는 몰리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마저 소유하고자 했으며, 그 어떤 이념적 가치보다도 은밀하고 압도적으로 몰리 레인의 죽음을 독점한 신자유주의의 화신이다.
작품 속 모든 남자들은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몰리 레인을 사랑했다고 주장하나, 실상 그들 모두 그 어느 누구보다도 위선적인 나르시시스트들이다. 그들에게 몰리의 죽음은 상대의 입을 막고 자신이 했던 사랑만이 대단했다 목놓아 부르짖을 핑계이자 수단일 뿐이다.
작품은 클라이브와 버넌이 서로를 상대로, 혹은 가머니를 상대로 보여주는 윤리적·위선적 갈등을 짚으며 절정에 다다른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사적 삶에 침투하여 횡행해도 되는 것인가? 눈앞에서 폭력을 목격하고도 그것이 (연인 간/가족 간) 사적 폭력이란 이유로 방관해도 되는 것인가? 작품의 목적지인 암스테르담에서의 안락사는 존엄한 죽음을 위한 유토피아이기만 한가, 이를 악용하는 자들은 없는가?
"열린 문명의 관대함" 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더 깊고 내밀한 정체성의 영역으로 침잠하게 할 뿐이며, 서로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과를 보일 뿐이다. 작품 속 인물들이 사는 런던이라는 현실 무대는 일견 "디자인, 요리, 잘 숙성된 와인 등을 포함한 모든 예술의 종합" 처럼 보이나, 사실 그 실상은 소비자본주의가 이루어낸 "을씨년스러운 허섭쓰레기들의 지옥" 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차분하고 문명화된, 관대하고 열린 사고를 지닌 성숙한" 암스테르담을 이상적 종착지로 여기지만 비윤리적 안락사를 행하는 모습에서 결국 수면 아래 암스테르담의 현실 또한 런던의 현실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빙산처럼 대부분 물에 잠겨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사회적 자아만이 하얗고 냉랭하게 밖으로 솟아 있다. 수면 아래 희귀한 모습, 한 인간의 은밀한 사생활과 혼돈이 결코 드러나지 않으며, 자신이 아는 것조차 회상과 환상에 기반한 것일 뿐이다.
한 여자를 둘러싼 세 남자의 공멸은 사실상 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아닌, 자본의 화신인 남편 조지의 손아귀에서 짜였음이 드러나고, 이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조지)의 지배하에 놓여 있으나, 무용하기 짝이 없는 개인(몰리)과 이념(전 연인들) 간 관계' 라는 알레고리적 예속 관계로 확장된다.
생명 가득하던 몰리 레인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작품은 그의 죽음에 대한 별다른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죽음 이전 몰리의 삶과 사랑도 전 연인들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죽은 자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몰리 레인의 죽음은 네 남자를 등장시킬 수단과 객체로써의 비극에 불과한 것인가?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으로써 살아생전 자신을 예속시키려던 네 남자로부터의 해방을 이룬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여기서 만나
얼싸안았던 친구들은 떠났다.
각자 저마다의 과오를 향해.
<W.H. 오든, 「십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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