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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Aug 24. 2023

조선을 지배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절節

드라마 <몹시 그리워하고 사랑한, 연인戀人>

요즘 자나 깨나 <연인> 생각만 한다. <역적> 이후 오랜 기간을 기다려온 황진영 작가님 작품이 기대 이상으로 재밌다는 흥분감과 함께 밥 먹으면서도 보고 자기 전에도 보고 틈날 때마다 보고 있으니, 뭐 그렇다.


이 드라마의 좋은 점을 꼽아보라면, 우선 주인공 유길채 캐릭터의 주체성이다. 현대의 시각에서 길채는 운명적 사랑과 결혼에 미친 철부지 같아 보일 수 있겠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에 따른 정략결혼이 부지기수였던 시대에 끊임없이 "자신의 낭군님은 자신이 택하겠다" 선언하며 숱한 운명적 기로에서 스스로 삶을 선택해 나가는 길채의 모습은 이 드라마가 가진 굉장한 매력 중 하나이다.


내가 이 드라마에서 눈을 뗄 수 없는 또 다른 포인트는 여태 남성서사/왕족사대부서사로 그려져 왔던 전쟁이라는 거대담론적 서사가 주인공 유길채를 비롯하여 능군리 여인들을 중심으로 한 여성서사/민중서사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로선 이전까지는 같은 상황을 그려도 왕실과 귀족들의 입장만 보여주다 결국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점에서 다소 패배주의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민중의 살고자 하는 투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남겠다는 연대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국가와 우두머리들이 아닌 이 순간을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애국심이 들기까지 한다.



1부의 절반 가량이 지났다. 물론 2부의 흐름은 어찌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서사로 보아 이 작품의 주요 키워드와 메타포는 절節 이라 생각한다. 작품은 조선을 지탱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절> 이 삼강의 이름으로 '임금을 향한' 백성의 <충절忠節> 과 '지아비를 향한' 여인의 <정절貞節> 을 강요하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주인공 이장현은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매타작을 당하는 어머니를 지켜본 듯하다. 하여, 일찍이 사내로서 사랑하는 연인과 혼인하고 싶을 정도의 깊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 상대에게 족쇄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비혼을 자처하나, 길채와의 만남은 그를 걷잡을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만든다.


전쟁이 터지자 인조는 산성으로 숨어든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로지 종묘와 사직을 지키지 못하는 것, 오랑캐 왕 누르하치에게 무릎을 꿇는 것. 산성에 틀어박혀 자신을 지켜줄 군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인조의 안중에 무방비 상태로 오랑캐와 접전으로 맞닥뜨릴 백성의 안위에 대한 걱정은 없다.


여인이 사내를 따르고, 자식이 부모를 섬기고, 신하가 임금에 충성하는 질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섬김을 받았으니 사내와 부모는 여인과 자식을 보호하고, 임금과 사대부는 백성을 지킬 의무가 있어요. 나는 임금님을 구하다 죽을 것입니다. 내가 임금을 위해 죽으면, 임금께서는 백성들을 지켜주실 것이오. 내가 믿는 것은 그뿐입니다.
(연준, 5화)


순례길을 걷듯 '임금 계신 곳' 을 향하는 연준과 능군리 도련님들. 연준은 "섬김을 받았으니 사내와 부모는 여인과 자식을 보호하고, 임금과 사대부는 백성을 지킬 의무가 있다" 고 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연인 은애를 지킨 적이 없으며 임금과 사대부는 백성을 지킨 적이 없다.


일부종사一夫從事, 삼종지도三從之道 라는 '귀한' 가르침을 받고 자란 능군리 애기씨들은 정작 전쟁이 터지자 자신들이 지키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오직 <곁에 있는 서로뿐> 임을 깨닫는다. 비록 "오랑캐에게 욕을 보이면 즉시 자결" 하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을지언정, 그들의 <은장도> 는 자신들의 목이 아닌 오랑캐의 목을 겨누어 서로를 지킬 무기가 되고, 새로운 삶을 이어나갈 탯줄을 끊을 도구가 된다.


1화에서 "천명이 명에 있으니 명이 반드시 오랑캐를 이길 것이다? 오랑캐에게 천명은 오랑캐에게 있소이다." 라는 장현의 말에, 연준은 명에 대한 의리를 주장하며 "천명은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 지고지순한 의리가 천명이오." 라 이야기한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임금을 구하지 않겠노라 이야기하는 장현을 비웃지만, 백면서생의 헛된 구호는 오랑캐의 칼날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황진영 작가님은 '사랑에 빠진 인간이 어디까지, 무슨 일까지 할 수 있는가' 에 대한 화두를 던지며 작품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임금님을 지켜드리겠다' 는 허황된 생각으로 능군리를 버렸던 능군리 도령들은 능군리 애기씨들의 정절/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오로지 자신의 생존과 종묘사직의 유지만을 염두에 두었던 인조는 백성들충절/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가. 개인적으로 걷지도 못하는 갓난쟁이 '귀한' 원손 하나만을 살리겠다고, 강을 건너고자 배를 태워달라 애원하는 능군리 부녀자들의 울부짖음에 칼부림 협박을 일삼던 장면을 보며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초반부 길채는 늘 "꿈속 낭군님이 <오시길>" 바란다. 그러나 전쟁과 생존에 대한 각성 후 연인 이장현을 향한 길채의 여정은 기다림이 아닌, 자신의 발을 뗀 달음박질의 연속이다.


문득 서막에서 장현이 읊조린 말이 떠오른다. "들리는가, 이 소리. 꽃 소리." 그가 들었고 열망하는 꽃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아마 "봄에는 꽃구경하고 여름엔 냇물에 발 담그고 가을에 담근 머루주를 겨울에 꺼내 마시 함께 늙어가는"  꿈꾸는 길채를 향한, 평범한 필부로서의 사랑이자 자신을 향해 달려올 연인을 향한 기다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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