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휴먼 스테인(The Human Stain)>, 필립 로스 저
학부 2학년 때였나 3학년 때였나 수업 시간에 다룬 적이 있었다. 그 수업의 교수님은 수업 중에 어떤 화두가 나오면 다음 시간에 그것과 관련된 주제로 수업을 이끌던 분이셨는데, 여성혐오 ㅡ 구체적으로 모니카 르윈스키와 관련된 편견과 인습적 낙인에 관해 이야기를 하시다 이 작품을 다루셨다. 발췌독이었지만 그 당시 나는 예측할 수 없는 교수님의 수업 방식에 지치기도 하고 작가의 장광설에 피로를 느껴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최근 다시 읽은 <휴먼 스테인> 은 대문호의 손길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문명의 진상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은 콜먼 실크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미국으로 상징되는 문명의 근원에서 작동하는 관습과 규율, 그 속에서 소외된 이들, 그리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주류 문화의 폭력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 콜먼 실크는 제도와 규범의 일원이 되고자 자신의 혈통적 근원을 비롯한 모든 것을 버린 비극적 영웅이었다. 그는 본디 흑인으로 태어났으나 군대라는 미 제국의 중심에 입성하기 위해 자신을 옥죄던 피부색을 집어 던지고 스스로 정체성을 재정립한다. 주류의 일원이 되고 관습의 중심에 서기 위해 백인 유태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고등교육으로 재무장해 아테나대학의 교수가 되었던 콜먼. "백합처럼 새하얀 이들의 위선" 으로 가득찬 아테나대학은 그리스 비극의 양상처럼 아테나라는 문명의 진원지를 상징하는 곳으로, 그는 그 아테나의 중심에서 부조리를 타파하고 변혁을 꾀하는 영웅적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콜먼은 스푹스Spooks 사건이라는 '우연한' 계기를 통해 문명의 중심에서 끝없이 추락하게 된다.
추락한 그의 곁엔 포니아가 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절반만큼이나 어리고 아테나 대학의 가장 밑바닥에서 잡부 역할을 하는 여자. 어려서는 부모로부터의 폭력에, 자라서는 남편의 폭력에 길들여진 여자. 문자와 함께 발전한 문명이 끝없이 경계 밖으로 밀어내고 '불건전하고도 불온하다' 낙인 찍으며 그 고통을 외면해온 여자. 하지만 포니아가 가진 제도 밖 속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콜먼을 '본연의 자신' 으로 돌아가는 황홀경에 빠지게 만든다. 콜먼의 주변인들은 포니아가 그의 삶을 파멸시킬 거라 겁박하나, 사실 포니아는 콜먼을 겹겹이 쌓인 인공적 정체성의 껍질을 벗겨낸 '가장 단순한 벌거벗은 존재' 로 되돌릴 구원자나 마찬가지였다.
작품 속 인습의 족쇄는 콜먼과 포니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규범의 폭력은 전쟁으로 확장되고, 포니아의 남편 팔리는 그 폭력의 희생자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그는 국가의 명에 따라 '노란' 인간들을 살상하는데 길들여지나 이는 고엽제 피해라는 카운터펀치로 돌아온다. 더불어, 콜먼과 대립하는 또 다른 인물인 델핀 루는 프랑스 규범이 길러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델핀 루 또한 미국이라는 제국의 중심에서는 이방인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분명 콜먼을 상대로 한 루의 고발은 부당하다. 그러나 루와 포니아, 그리고 작중에서 이름으로만 언급되는 모니카 르윈스키의 존재는 한 사회의 숱한 정치적 올바름을 향한 진전 속에서도 여전히 여성혐오에 대해서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방증한다.
작품은 콜먼과 포니아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그들의 죽음은 '비정상적' 인 팔리가 저지른 일탈적 죄에 불과한가? 그만 없었더라면 그들의 죽음은 없던 일이 될 수 있었는가? 콜먼과 포니아의 죽음은 약자가 약자를 상대로 휘두른, 인습의 폭력이 초래한 결과는 아닌가. 신기한 점은 작품 전반에 걸쳐 와스프WASP 로 대변되는 주류 문화는 주체로서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그들이 짜놓은 촘촘한 인습의 거미줄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문명은 콜먼과 포니아를 비롯해 제도의 표준에서 벗어난 이들을 얼룩/오점이라 칭한다. 휴먼 스테인Human Stain, 존재로서 사회의 얼룩이 된 이들. 그러나 주류가 경멸해 마지 않는 얼룩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얼룩은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불온한 그 무언가인가, 혹 주류 문명이 폭력으로써 지진 고통의 낙인은 아닌가?
아이러니하게도 콜먼은 스푹스 사건으로 인해 자신을 옥죄던 그 모든 인습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신의 욕망에 자유로워졌다. 물론 운명은 가혹하게도, 감히 네 발의 족쇄로 채운 삶의 굴레를 끊어내려 하느냐 으름장을 놓으며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지만. 그러나 이 '변종' 과 같은 영웅의 슬픈 일생은 죽음과 함께 잊혀져야 하는가? 작가 필립 로스는 세상에 그의 삶을 내보일 이야기꾼을 준비해둔다. 처음엔 "내 일이 아니라" 며 외면했던 작가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내레이터는, 추악한 진실에 근접할수록 세상에 콜먼 실크라는 한 인간의 진실한 삶을 내보임과 동시에 그에게 가해진 주류 문화의 인습적 폭력을 고발하리라는 다짐을 한다.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정말로 알고 있는가. 타인이 가진 그 모든 공백과 비밀을, "어떤 일이 어떻게 해서 그런 식으로 일어나는지, 인간사를 규정하는 사건들, 불확실성들, 사고들, 불화, 충격적인 부조리의 연속인 난맥상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정말로 모두가 알고 있는가? 감히 전지전능한 신의 행세를 하며 타인의 삶을 짓밟고자 내세우는 착각과 오만이 아닌가?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모든 걸 안다" 고 자만하는 인습의 속박에서 해방된, 폭풍 속으로 사라진 연인. 작품은 그들의 삶을 통해 타인의 삶과 아픔에 관해 상상하면서도 그 상상력이 그를 겨눈 무기가 되어선 안 된다고 경고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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